2012년 6월 20일 수요일

남편이라면...

남편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지난 주말은 father's day 였다. 이젠 정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걸 새삼 느끼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가정의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다. 특히 가장으로서 우리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 묵상하고 고민하면서 남편으로서의 나의 모습 또한 돌아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베드로 사도의 남편에 대한 말씀이 마음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라...
 여권 신장의 시대는 단순히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향상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어쩌면 많은 남편들이 더이상 아내들의 연약함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으로 몰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하게 취급 받아야 한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짐과 동시에 '우리는 연약한 여성이라서 남성과 동등하게 취급받아서는 안된다'는 논리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과연 여성이 정말 연약하고 섬세하게 보살펴야 하는 대상인가?'라는 생각이 잠재적으로 남성들의 내면에 깊이 파고든 것은 아닐런지...그런 의미에서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주목받고 승승장구하는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때 부어주신 근본적인 속성이다. 아무리 외적으로는 단단해 보이고 튼튼해 보인다 할지라도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섬세하고 내적인 상처를 받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물론 물리적으로도 더 약한 것도 사실이고...그렇기에 우리의 눈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창조하신 그대로를 보시는 주님의 눈으로 보면 여성들은 연약한 그릇처럼 보살펴야 하는 존재이다. 여성들 자체가 그렇다면 사랑하는 아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긍휼과 배려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나부터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아 아내에게 많이 미안했다. 주님의 눈으로가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 놓은 여성상과 남성상의 기준에 따라 이기적인 눈으로 바라본 것이...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라...
 '함께'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온다. 요즈음 주변의 많은 부부들을 보면, 아니 부부들 뿐만 아니라 가족들 자체가 각각 따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한 집에 살고 부부라는 단어로, 가족이라는 단어로 묶여있을 뿐이지 그저 각각 자신의 삶의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하지만 가족이라면, 부부라면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를 보완해주고, 격려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것...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들 가정에게 부어주실 생명의 은혜를 이어받는 길일 것이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우리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남편들이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보지 않고, 함께 주님의 은혜속에 거하는 존재로 보지 못한다면 기도가 막혀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기도라는 것이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는 중요한 통로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사실은 정말 중요하다. 사실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의 삶이 무너지고 마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 아니던가! 부부간의 문제가 있으면 직장에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 뿐만 아닐 주님과의 교제의 자리에도 나아가기 싫은 것이 사실이다. 부부 관계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에서는 부부 관계를 통해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던가? 우리를 말할수 없이 긍휼하게 보심으로 스스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죽음의 길을 택하시는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았던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셨다. 친구로 불러 주심으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알도록 해 주셨다. 여기서 부부의 관계와 예수님과의 교회, 즉 우리의 관계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생각해보면 많은 부분이 클릭이 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남편이신 예수님은 그 삶을 통해 베드로 전서에서 전하는 남편의 역할을 완벽하게 보여주셨다. 우리를 향한 긍휼과 사랑을 보여주셨고,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심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될 것이라 하셨다. 바로 우리의 기도의 문이 열린다는 말씀이 아니던가...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중보자심을 생각할 때, 우리의 기도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가 아버지로 하여금 응답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임을 또한 생각해볼 수 있다. 베드로 전서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이미 이천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에게 참된 남편상을 보여주신 것이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5:14-16
 남편이라면, 주님의 눈으로 아내를 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깨달음이 가슴 깊이 꽂힌다. 아마도 그렇게 살지 못했었기에 더 그렇겠지. 나의 눈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봄으로 혹시나 깨지지 않을까 조심조심 소중히 다루며, 함께 삶의 비전을 나누고 기도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하여서 우리의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승리의 삶을 부부가 '함께' 누리며 사는 것!! 오늘의 이 생각을 늘 잊지 않고 나의 삶속에 적용시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잠 18:22


2012년 6월 4일 월요일

성숙, 그리고 포용

 요즈음은 성숙함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작은 심적인 불편함조차 감내하지 못하고 혈기를 내뿜게 되는 내 모습을 통해 때로는 답답함으로, 또한 때로는 실망으로 돌아보게 되는데 그 성숙이라는 것이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닌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 하셨나보다. 불의 연단을 거쳐 자신의 내면의 모든 죄된 속성을 태워버림으로 보다 성숙함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이시기에...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소멸되려면 인내와 자성의 시간을 계속 보내야 하는 것 같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로부터 성숙함에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되지만 끊임없는 연단의 과정의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과 다윗이 아닐까 싶다. 특히 다윗의 삶은 연단 그 자체였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끊을 놓치지 않으며 스스로를 정화시켜 가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며칠전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는 다윗의 이야기에 나오는 시므이와 그를 대하는 다윗을 태도로 부터 성숙의 한 열매인 포용력을 다시 한 번 주목하여 보게 되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삼하 16: 5-8

 아무리 압살롬을 피해 도성을 떠나 도망가는 처지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왕이고, 또한 온갖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사인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시므이도 제정신이 아닌 것이겠지만, 그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참으로 주목할만 하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 9-11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푼다라고 하였던가? 우리는 흔히 무언가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이 있으면 너무나도 쉽게 다른 작은 disturbance에 대해서도 증폭된 화를 내뿜게 되곤 한다. 헌데 지금의 다윗의 처지는 종로에서 뺨맞은 수준을 넘어서 종로에서 핵폭탄을 맞고 나가 떨어진 상태나 다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껏 아무소리 못하고 조용히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다윗의 잘못도 아닌 일을 가지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돌까지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명령 한 마디면 그냥 쓸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건만 다윗은 그저 내버려 두라고 한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는 바로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고, 무언가 불편하고, 때로는 무지 화가나는 상황에 있어서도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뒤끝없이 참아내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으로 그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눈으로 그 상황을 보고, 분석하다 보면 결국은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게 되고, 분을 품게 되거나 혈기를 표출하게 된다. 사탄의 전략을 생각해보면, 그 상황을 내가 당하지 말아야 할 부당한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함과 동시에 우리의 화를 정당화 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상황이든지간에 내가 중심이고, 내가 최우선인 무대로 끌어내려 나만의 기준과 사고체계 하에서 계속해서 곱씹게 하는 전략...하지만 여기서 그 문제가 벌어지는 무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옮겨 확장시켜 버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이상 나의 기준과 나의 정의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기준과 뜻이 전부인 상황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사함으로 참고 인내하고 그 문제를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바로 올바른 포용력의 모습이고, 성숙함이란 그런 포용력을 우리의 모든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45: 7-8

 우리는 요셉으로 부터도 비슷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형들이 질투심으로 인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긴 세월을 종살이와 감옥 살이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용서할 수 있는 포용력...개인적으로 요셉은 그 고난의 시간을 통해 연단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상황을 볼 수 있는 성숙을 얻었다고 믿는다.

 지금도 나의 삶에는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라고 따지며 나의 잣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반응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 내가 그 상황들을 편협한 나의 기준과 나의 정의로 풀어나가려 할 때, 나의 삶에는 어쩔 수 없는 분쟁과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씩 나의 시야를 넓혀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사탄들이 조금씩 조금씩 나의 자존심과 기준들을 자극하며 만들어 놓은 분쟁과 다툼의 무대를 뒤엎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더 큰 무대로 옮겨서 봄으로써 그 문제를 포용할 수 있는 성숙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