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4일 월요일

성숙, 그리고 포용

 요즈음은 성숙함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작은 심적인 불편함조차 감내하지 못하고 혈기를 내뿜게 되는 내 모습을 통해 때로는 답답함으로, 또한 때로는 실망으로 돌아보게 되는데 그 성숙이라는 것이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닌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 하셨나보다. 불의 연단을 거쳐 자신의 내면의 모든 죄된 속성을 태워버림으로 보다 성숙함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이시기에...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소멸되려면 인내와 자성의 시간을 계속 보내야 하는 것 같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로부터 성숙함에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되지만 끊임없는 연단의 과정의 대표적인 인물은 요셉과 다윗이 아닐까 싶다. 특히 다윗의 삶은 연단 그 자체였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끊을 놓치지 않으며 스스로를 정화시켜 가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며칠전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는 다윗의 이야기에 나오는 시므이와 그를 대하는 다윗을 태도로 부터 성숙의 한 열매인 포용력을 다시 한 번 주목하여 보게 되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삼하 16: 5-8

 아무리 압살롬을 피해 도성을 떠나 도망가는 처지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왕이고, 또한 온갖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사인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시므이도 제정신이 아닌 것이겠지만, 그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참으로 주목할만 하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 9-11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푼다라고 하였던가? 우리는 흔히 무언가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이 있으면 너무나도 쉽게 다른 작은 disturbance에 대해서도 증폭된 화를 내뿜게 되곤 한다. 헌데 지금의 다윗의 처지는 종로에서 뺨맞은 수준을 넘어서 종로에서 핵폭탄을 맞고 나가 떨어진 상태나 다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껏 아무소리 못하고 조용히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다윗의 잘못도 아닌 일을 가지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돌까지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명령 한 마디면 그냥 쓸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건만 다윗은 그저 내버려 두라고 한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는 바로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고, 무언가 불편하고, 때로는 무지 화가나는 상황에 있어서도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뒤끝없이 참아내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으로 그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눈으로 그 상황을 보고, 분석하다 보면 결국은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자존심이 고개를 쳐들게 되고, 분을 품게 되거나 혈기를 표출하게 된다. 사탄의 전략을 생각해보면, 그 상황을 내가 당하지 말아야 할 부당한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함과 동시에 우리의 화를 정당화 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상황이든지간에 내가 중심이고, 내가 최우선인 무대로 끌어내려 나만의 기준과 사고체계 하에서 계속해서 곱씹게 하는 전략...하지만 여기서 그 문제가 벌어지는 무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옮겨 확장시켜 버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이상 나의 기준과 나의 정의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기준과 뜻이 전부인 상황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사함으로 참고 인내하고 그 문제를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바로 올바른 포용력의 모습이고, 성숙함이란 그런 포용력을 우리의 모든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45: 7-8

 우리는 요셉으로 부터도 비슷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형들이 질투심으로 인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긴 세월을 종살이와 감옥 살이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용서할 수 있는 포용력...개인적으로 요셉은 그 고난의 시간을 통해 연단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상황을 볼 수 있는 성숙을 얻었다고 믿는다.

 지금도 나의 삶에는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라고 따지며 나의 잣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반응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 내가 그 상황들을 편협한 나의 기준과 나의 정의로 풀어나가려 할 때, 나의 삶에는 어쩔 수 없는 분쟁과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씩 나의 시야를 넓혀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사탄들이 조금씩 조금씩 나의 자존심과 기준들을 자극하며 만들어 놓은 분쟁과 다툼의 무대를 뒤엎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더 큰 무대로 옮겨서 봄으로써 그 문제를 포용할 수 있는 성숙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