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2일 목요일

고난을 통한 희망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감동이 있는 스토리이다. 이번에 사사기를 읽으며 만난 기드온의 메세지에서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사 6: 15-16
미디안으로부터 고난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선택함을 받은 기드온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작은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속적인 확인이 필요했다.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의 계속적인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그의 요청대로 양털과 이슬을 통해 두 번의 confirm을 해 주신다. 아마도 상당한 불안과 혼란의 상황에 있었을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이 confirmation은 확신과 희망이 되었을 것이다. 겨우 힘을 내서 전쟁에 나가려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또다른 도전을 주신다. 3만명이 넘는 군사를 일으킨 기드온에게 추리고 추려서 결국 3백명의 군사만 남기라고 하신 것이다. 3백명의 군사만을 남겨두고 수많은 메뚜기떼가 모여있는 것과 같은 적진을 바라보는 기드온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겠는가? 어쩌면 과연 자신이 무얼하고 있는걸까 하는 불안과 불신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또다른 희망의 불씨를 안겨주신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삿 7:9-11
주님의 말씀을 따라 적진에 내려간 기드온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다. 한 사람의 꿈과 그 친구의 해몽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한 기드온은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담대히 승전을 선언하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삿 7:15
두려운 나머지 혼자서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수도 없었던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드온에게는 희망이라는 씨앗이 심어졌으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희망,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리케 하신다는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워 결국 기드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승리를 이끄는 주역이 되게 한 것이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혼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주님께로 돌아가야 할 절대적인 필요를 깨닫게 하길 원하셨고,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사는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이런 시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품길 원하는 희망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언제가 그들이 처한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란 차원에서의 희망이었을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바라신 희망은 물리적인 해결책을 넘어선 차원의 희망일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희망을 말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 3-5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환난을 기뻐함으로 받으라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많은 말씀들을 성경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이런 환난을 통해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또한 연단을 받는다고 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연단에 해당되는 단어는 'character'이다. 결국 고난을 통과하며 인내하다 보면 우리의 성품이 성숙하게 되고 이러한 성품은 소망 (희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성품의 성숙 단계까지는 이해가 되어도 소망은 언뜻 와닿지 않았다. 만일 여기서의 소망이 단순히 현재 처한 어려운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에 해당하는 소망이라면 문제가 제기된다. 모든 신앙인들이 고난을 거쳐 인내와 연단의 단계를 통과해 소망의 단계에 이른다면 "짠~!!" 하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적어도 나의 경우는) 모든 단계를 거쳐 소망을 품게 되면 더 큰 실패를 겪게되곤 했다. 더구나 이런 논리적 전개는 궁극적으로 모든 크리스찬이 다 잘 살고 잘 되어야 한다는 소위 기복 신앙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5절을 보자. 바울은 이렇게 주어진 소망이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disappoint)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신약 시대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항상 이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음 또한 볼 수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 고난을 통해, 혼란의 시기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가장 큰 유익중 하나인 것이다.

작고 보잘것 없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무너뜨리고, 전장에 나아가 300명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무너뜨린 것도,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금만 살펴보면 우리는 이 소망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다니엘 등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바로 이 소망 위에 바로 설 수 있었음이 아니던가!!

며칠전 연이은 실패와 답답함으로 너무 힘들어 빈 강의실을 찾아 기도하고 있을 때 주신 말씀 또한 바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고 그 말씀이 나에게는 소망이 되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신 31:7-8
모든 일이 잘 진행되어서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리라는 희망이 아니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는 평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그 소망을 통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다. 다른 그 어떠한 것 보다도 이 희망적인 메세지를 품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앞으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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