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믿음의 행동이다. 나에게도 아브라함은 그런 행동파 믿음의 선조로서 강하게 인식되어 있었다.
지난 주말, Joanne 사모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우선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동일한 약속의 말씀을 여러번 받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어쩌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confirm해 주시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큰 믿음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브라함 역시 믿음의 여정에서 나약함을 여러번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나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이시기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직접 confirm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그것이 큰 은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란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1-3
칠십오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가족과 터전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 12:7
하나님께서는 분명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의 시작이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약속하셨고,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다. 순조로운 믿음의 여정의 시작으로 보였지만 이내 큰 기근이 들고,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다. 기근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떠나 인간적인 눈에 보이는 안전한 곳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내 사라로 인해 바로가 자신을 죽일 것이 걱정되어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행동까지 보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우리는 믿음의 조상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오히려 재정적인 축복을 허락하신다.
자신의 울타리였을 가족들을 떠나 하란을 나올 때부터 인간적인 의지의 대상이 되었을 롯을 떠나보낸 후에 하나님은 또다시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 13:14-17
그 이후에도 자신에게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힘들어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 3-5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창 17: 1-6
이렇듯 지속적인 약속의 말씀이 있었지만, 자식이 없는 현실 상황을 바라보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그 약속의 말씀을 굳건히 지겨 믿을만한 믿음이 충분치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앞에서 비웃음을 보이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니던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 믿음의 단련의 시기를 순종으로 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말도 안된다고 웃기도 했을 것이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믿음으로 밀어부치기도 했을 것이고, 하나님께 정말 하나님의 약속이 맞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순종이다. 100% 확신은 없더라도 'Yes. Lord!'라고 대답하며 행하는 순종!!
창세기 21장에 이르러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시작이 드러난다. 약속대로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이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지난 세월 '너를 통해 많은 민족이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과 씨름하며 자신의 믿음과 싸워왔던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삭이 태어난 순간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UPGRADE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싸움은 22장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1-2
하나님의 이 명령에 아브라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떠나는 순종의 모습만이 나올 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그 순간부터 아마도 아브라함의 머릿속은 온통 알 수 없는 질문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수많은 질문들...이삭이 태어나 주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 그 기쁨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처음 들었던 칠십오세의 시기까지 backward 되며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매 순간의 장면마다 물음표를 단 채...
드디어 손을 내밀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의 사자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1-12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얼마나 다급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인가! 그리고 그 순간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로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6-17
얼핏 보면 지금껏 앞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곳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조건적인 말씀을 덧붙여 말씀하신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 조건적인 이유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이런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내가 너로 수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림 끝에 얻은 아들을 내게 번제로 내 놓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내 약속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브라함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내가 배운 것은 바로 '믿음의 단련'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상황에서의 선택과 순종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은 있어야겠지만 그 요구되는 믿음의 깊이가 깊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현실의 상황 사이의 갭이 크면 클수록,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않을 수록 믿음의 더 깊은 연단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믿음의 깊이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보여주신다. '보아라. 네가 이만큼 나에게 나아왔구나. 너의 믿음이 이만큼 성장한 걸 보아라. 이제 내가 너에게 했던 그 약속을 이루어 주마.'
우리는 여전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믿음의 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조금만 더 버티고, 조금만 더 믿어 보아라.' 이런 응원의 말씀으로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응원하고 계실 것이다. 지쳐 포기할까봐 계속해서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나의 현실에 너무나도 큰 갭이 있는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의 깊이를 돌아볼 때가 아닐까? 이삭을 향해 칼을 들 때까지 아브라함이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믿음의 깊이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깊어지고 있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