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1일 목요일

Homeward Bound-Kristene Mueller

요즈음 '사랑'에 대해 많이 묵상하게 하게 되는데, 오늘은 Kristene Mueller의 'Homeward Bound'를 들으며 눈물이 왈칵 났다. 

'I will run this race for love!'
'I will fight this good fight of faith for love!'
'I can't wait to see your face...'

가사 한구절 한구절이 가슴에 와닿는다.








I will run, I will run this race,
And I will do it all for love.
Your love compels me forward,
Your love controls my heart,
And I just can't, I cannot get away.


So I will fight this good fight of faith,
And I will do it all for love.
You are my great reward,
You're so worth fighting for
And I can't wait to see Your face.


So I will run, I will run this race,
And I will do it all for love.
Your love compels me forward,
Your love controls my heart,
And I just can't, I cannot get away.


So I will fight this good fight of faith,
And I will do it all for love.
You are my great reward,
You're so worth fighting for
And I can't wait to see Your face,
And I can't wait to see Your face.


Hallelujah
Hallelujah
Hallelujah
...

2012년 5월 29일 화요일

온전함을 위하여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 11:39-40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아마도 그들의 믿음은 우리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도 커서 성경에까지 소개된 것이고 나는 너무나도 부족하기에 그저 그들을 뒤쫓아 가는 것 뿐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가 쉬운 것 같다. 하지만 히브리서에 소개된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분발케 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아니면 그렇게 커보이기만 하는 믿음의 조상들의 일들도 온전케 되지 않는다는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그 감동의 스토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삶이 그 역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가슴 설레이게 하는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저 주님께서 이끄시는대로 그 disciplines을 따르며 살아가면 된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면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을 날마다 배워가며 실천하는 삶이 되면 된다. 그렇지만 그 삶이 늘 기쁨과 희망으로만 가득하지만은 않은 것임을 12장에서 보여주신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 말처럼,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은 쉽지 않다. 매 순간 고개를 쳐드는 우리의 육적인 죄의 속성들과 마주하고 싸워 나가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도, 또한 쉬운 일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이 힘들고, 피곤하고, 낙심하기 쉬운 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모든 길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그 길을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날마다 조금씩 더 주님의 그 크신 계획에, 주님의 감동의 스토리를 온전케 하는데 참여할 수 있다.

 성령님, 오늘도 성령님과 동행하길 원합니다. 저로 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함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의 약속의 온전히 이루어짐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소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을리기 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13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위로가 필요할 때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시 25:16-2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묵상할수록 위로가 되는 말씀...

2012년 5월 15일 화요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흔히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믿음의 행동이다. 나에게도 아브라함은 그런 행동파 믿음의 선조로서 강하게 인식되어 있었다.

 지난 주말, Joanne 사모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우선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동일한 약속의 말씀을 여러번 받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어쩌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confirm해 주시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큰 믿음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브라함 역시 믿음의 여정에서 나약함을 여러번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나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이시기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직접 confirm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그것이 큰 은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란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1-3

 칠십오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가족과 터전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 12:7

 하나님께서는 분명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의 시작이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약속하셨고,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다. 순조로운 믿음의 여정의 시작으로 보였지만 이내 큰 기근이 들고,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다. 기근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떠나 인간적인 눈에 보이는 안전한 곳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내 사라로 인해 바로가 자신을 죽일 것이 걱정되어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행동까지 보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우리는 믿음의 조상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오히려 재정적인 축복을 허락하신다.

 자신의 울타리였을 가족들을 떠나 하란을 나올 때부터 인간적인 의지의 대상이 되었을 롯을 떠나보낸 후에 하나님은 또다시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 13:14-17

 그 이후에도 자신에게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힘들어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 3-5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창 17: 1-6

 이렇듯 지속적인 약속의 말씀이 있었지만, 자식이 없는 현실 상황을 바라보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그 약속의 말씀을 굳건히 지겨 믿을만한 믿음이 충분치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앞에서 비웃음을 보이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니던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 믿음의 단련의 시기를 순종으로 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말도 안된다고 웃기도 했을 것이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믿음으로 밀어부치기도 했을 것이고, 하나님께 정말 하나님의 약속이 맞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순종이다. 100% 확신은 없더라도 'Yes. Lord!'라고 대답하며 행하는 순종!!

 창세기 21장에 이르러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시작이 드러난다. 약속대로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이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지난 세월 '너를 통해 많은 민족이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과 씨름하며 자신의 믿음과 싸워왔던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삭이 태어난 순간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UPGRADE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싸움은 22장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1-2

 하나님의 이 명령에 아브라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떠나는 순종의 모습만이 나올 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그 순간부터 아마도 아브라함의 머릿속은 온통 알 수 없는 질문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수많은 질문들...이삭이 태어나 주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 그 기쁨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처음 들었던 칠십오세의 시기까지 backward 되며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매 순간의 장면마다 물음표를 단 채...

 드디어 손을 내밀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의 사자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1-12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얼마나 다급한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인가! 그리고 그 순간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로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6-17

 얼핏 보면 지금껏 앞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곳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조건적인 말씀을 덧붙여 말씀하신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 조건적인 이유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이런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내가 너로 수많은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림 끝에 얻은 아들을 내게 번제로 내 놓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내 약속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브라함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내가 배운 것은 바로 '믿음의 단련'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상황에서의 선택과 순종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은 있어야겠지만 그 요구되는 믿음의 깊이가 깊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현실의 상황 사이의 갭이 크면 클수록,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않을 수록 믿음의 더 깊은 연단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믿음의 깊이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보여주신다. '보아라. 네가 이만큼 나에게 나아왔구나. 너의 믿음이 이만큼 성장한 걸 보아라. 이제 내가 너에게 했던 그 약속을 이루어 주마.'

 우리는 여전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믿음의 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조금만 더 버티고, 조금만 더 믿어 보아라.' 이런 응원의 말씀으로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응원하고 계실 것이다. 지쳐 포기할까봐 계속해서 약속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나의 현실에 너무나도 큰 갭이 있는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의 깊이를 돌아볼 때가 아닐까? 이삭을 향해 칼을 들 때까지 아브라함이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믿음의 깊이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깊어지고 있을 것이니.

2012년 5월 3일 목요일

조지 워싱턴 카버 이야기


연구가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는 이 분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싶다. '하나님의 작은 실험실'...멋지지 않은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라는 잠언 3장 6절의 말씀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그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언젠가 이 분의 이야기라는 '땅콩박사'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
조지 워싱턴 카버 :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은 미국의 과학자(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
    과학자들이나 발명가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이 들은 것을 실행으로 옮겼다. 그 결과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이와 같이 새로운 발견은 하나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중에 미국의 위대한 과학자 죠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가 있다. 강한 믿음과 결단이 없이는 정복할 수 없었던 많은 난관이 있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모든 문제들을 극복하였다. 그 결과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감은 미국과 전 세계를 변화시켰다.

남북전쟁말경 미조리에서 흑인 노예로 태어나 아기때 고아가 된 카버는 그의 어머니의 주인이었던 모세와 수잔 카버부부에 의하여 키워졌다. 그는 워낙 병약하여 힘든 일을 할 수 없었던 터라, 수잔의 집안일과 정원손질을 도왔는데, 그는 그러한 환경에서 늘 탐구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줄곧 그는 숲속에 가서 공부를 하며 꽃과 풀들에게 이야기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믿었으며, 모든 사물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가 사랑으로 돌보아주는 화초들은 잘 자랐으며, 곧 그는 '화초 의사'라고 불리워졌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숲과 들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예배당과 같다.


그의 꿈, 하나님의 계획을 추구하는 것

그는 만족할 줄 모르고 지식 탐구에 열중하였다. 이웃마을의 흑인 학교에 들어가기에 나이가 너무 어렸을 때에는 카버씨 집에서 웹스터의 철자법을 공부하였다. 그 이후에 어느 흑인 부부의 집에서 일을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그는 주인부부에게서 성경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다. 그는 그 성경을 평생토록 매일 읽었다. 카버부인은 그가 교육을 받아서 그것을 그의 민족을 위하여 사용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문을 끊임없이 탐구한 결과 켄자스로 인도하심을 받기까지 그는 많은 시험과 막힘과 인종차별들을 이겨내야만 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는 과학 학사학위와 농업 및 미생물식물학 석사학위를 얻었다.

부커 워싱턴은 카버에게 그가 세운 알라바마의 터스키 흑인 교육 기관에서 근대 농업을 가르쳐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진정한 소명이었으며, 그는 그 소명을 위하여 지금까지 땀흘려 일해온 것이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교수직을 포기하고 터스키로 온 그는 벽에 부딪혔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였으며, 학교의 시설이라고는 작은 방 하나에 실험실이나 실험도구는 전무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목적이 분명하였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성취해먀만 했다.

그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먼저 온 마을의 쓰레기 더미를 파헤쳐서 쓸만한 병, 깡통, 혹은 무엇이든 실험실에서 쓸만한 것들을 수집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싼 기자제가 아니라, 오직 근면, 결단,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40 여년간 카버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연구와 가르침에 몰두한 결과 남부의 흑인 사회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몇백년간 목화 농사만 지어왔던 남부의 토지는 황폐하여 생산성이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과 농부들은 작물을 돌아가며 골고루 심음으로써 토지의 생산성을 회복시켰다.

'이동학교'의 창시자라고나 할까. 그는 마차를 타고 순회하며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지식을 전달해주었다. 그는 농사법과 대체작물에 대하여 가르쳤으며, 야채 요리법이나 야채 씨앗도 보급하였다. 마침내 남부의 농부들은 땅콩, 고구마, 대두 등을 심어 토지를 기름지게 하였다. 한편 고기와 삶은 곡류, 설탕 등으로 주식을 삼던 지역민들은 펠라그라병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카버는 그들이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도록 가르쳐주었다. 남부에 새 날이 도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작은 실험실

오랫동안 목화는 돈을 벌어들이는 작물이었으나, 황폐해진 남부에 마침내 목화를 대신하여 땅콩이 주작물이 되었다. 그러나 곧 땅콩이 과잉생산되어 엄청나게 많은 양이 팔리지 않고 남아돌게 되었다.

카버는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고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창조주 하나님, 왜 땅콩을 창조하셨는지 그 용도를 제게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자 창조주께서는 그에게 땅콩을 분해한 후에 다시 합성해보아라” 고 가르쳐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땅콩, 고구마, 대두 등을 활용할 수 있는 수백가지 용도를 가르쳐주셨다. 카버는 남부의 농업뿐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주었다. 사실 오늘날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는 그의 업적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종류의 음식, 페인트, 화장품, 산업용품, 의학용품 등은 얼핏보기에 미미한 이와 같은 농작물에서 파생된 상품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소를 하나님의 작은 실험실이라고 이름짓고는, 연구소 안에 성경책이외에는 아무책도 구비해놓지 않았다. 그는 실험을 어떻게 실행해야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쭈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하나님께서 커튼을 제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무능할 따름입니다.

그의 업적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터득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것이니라(잠언 8: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숲속에 들어가 하나님께로부터 그날 해야 할 일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연구실에 돌아와서 지시받은 것을 실행한다.(*영어성경에는 일찍(early)이라고 되어있음, 역자 주)

죠지 워싱턴 카버는 명예나 돈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그가 발견한 수많은 항목 중에 오직 소수만을 특허를 받았다. 헨리 포드, 토마스 에디슨, 마하트마 간디 등과 같은 세계적인 지도자나 과학자들에게 친구이자 조언을 해준 그는 훌류한 사업의 기회와 비싼 연봉을 마다하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 가지 길에 충실하였다. 그에게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성경에 나와있지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그의 삶은 미국의 흑인들이 많은 불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와 세계에 지속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강한 영적인 유산을 남겨주었다.


출처 : http://www.hislove.or.kr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우리는 살면서 많은 도전을 받는다. 그 도전들이 주님 안에서의 선한 목적을 품은 도전들이면 좋겠지만, 많은 도전들이 우리의 죄의 속성을 자극하고 유혹하는 것들인 경우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에게도 이런저런 많은 도전들이 다가오는데, 나의 개인적인 삶에서 경험하는 악한 뿌리에서 기인하는 도전들 중의 하나가 바로 비교이다. 내가 나약하고 흔들려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고 그로인해 시험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어떤 경우는 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 비교의 자리에 앉혀놓고 accuse 함으로 힘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경우가 더 이겨내기 힘든 상황으로 여겨진다. 이 경우에는 나도 그렇고, 비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그렇고 딱히 비교의 시험대에 올려질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저 사람은 저런데 너는 뭐냐!!'라는 식의 비교가 제 3자로부터 계속되다 보면 마치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 같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황이 되면 슬슬 올라오는 것이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blame을 당해야 하나'하는 억울함이고 이런 억울함을 조금만 방치하고 악한 영들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면 바로 들어오는 것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다.

 며칠 전 나의 마음속에도 이런 종류의 원망과 미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모든 경우가 비교로 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전개되는 양상이 참으로 비슷하다. (그러고보면 악한 영들의 전략들이라는 것도 한발짝 벗어나서 보면 참으로 단순한 것 같기도 하다.) 복잡 다단한 이유와 과정을 거쳐 나와는 별 상관 없지만 결국은 나를 피곤하거나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게 하는 원인 제공자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들...아무튼 이런 것들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고 주님께 회개하며 기도로 간구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날, 시편 73편을 보게 되었다. 악인은 모든 것에 형통한 반면 주님 안에 있는 자신은 재난과 징벌의 상황에 있음으로 힘들어 하는 시편 기자가 결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그 모든 것들이 결정되는 것임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안에 거하는 것을 소원하는 이 내용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임을 깨달았다. 그것이 비교가 되었건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되었건 내가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을 원망하고 미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에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결국에는 주님과 함께 영광속에 거할 수 있음을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6-27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라는 구절이 강하게 다가옴을 느낀다. 물론 우리가 억울하고 화가나고 서운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에 계속 분을 품고 있으면 사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죄로 치닫게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억울함이 올라온다면, 그리고 그 억울함을 방치하여 원망과 미움의 단계까지 올라왔다면 지체하지 말고 무릎꿇고 주님께 나아가야 함을 기억해야 겠다. 그 상황에서 주님으로 돌이킴으로 회개하고 원망과 미움의 대상을 축복하기 시작한다면, 사랑으로 품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틈을 노리고 들어오던 마귀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만해도 통쾌해 진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3

 그동안 주님의 보혈을 생각하면, 늘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에만 집중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 에베소서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의 피의 능력은 단순한 죄사함을 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 즉 약속의 언약의 백성이 아니었던 우리에게도 구원이 허락된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셨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되라 하신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7-10

 결국 하나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야 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을 품고,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사탄의 공격 신호가 떨어졌다는 적신호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상황을 보고, 나에게 힘든 상황을 주는 사람들을 보고 분을 품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고, 사랑하고, 중보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화가 치밀어 오는 상황에서는 정작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우리가 화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결국 우리는 그 원인 제공자를 보면서 사탄과 함께 대화하며 분냄에서 죄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주님 저에게 분별력을 주시어 제 안의 분노와 서운함과 원망과 미움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됨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