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8일 수요일

살아 있음은 기회이다

오랜시간 글을 올리지 않았다. 그동안의 지난 시간들, 그리고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상황들이 선뜻 무언가를 블로그에 올릴 만큼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요즈음은 지치고 힘든 상황 속에서 가장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 이전의 나의 묵상과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얻은 메세지임을 많이 깨닫는다. 아마도 업데이트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이 블로그를 가장 많이 방문하고 글을 읽으며 위로와 도전을 받은 사람이 나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방문자는 그리 많지 않으니 그러리라 확신한다 (^^). 이전 묵상 노트를 읽다가 발견한 글이 참 마음에 와 닿았고 이곳에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옮겨본다.


****************************************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찌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편 66:8-12

Bless our God, O peoples; let the sound of his praise be heard,
who has kept our soul among the living and has not let our feet slip.
For you, O God, have tested us;you have tried us as silver is tried.
You brought us into the net;you laid a crushing burden on our back;
you let men ride over our heads;we went through fire and through water;yet you have brought us out to a place of abundance.
Psalm 66:8-12

시편 기자는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라 말한다. 하지만 무엇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 없고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계속 죽음을 갈망하게 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라는 것이 선뜻 와 닿지를 않는다.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더구나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라 하지 않던가?

묵상을 하다보니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음은 주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눈에 띄는 영적/세상적 업적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단지 이곳에 있는것 만으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큰 그림으로 자신의 구속 사업을 진행시켜 가고 계신 주님의 일에 동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은혜이고, 기회이다. 그리고 주님은 더 큰 은혜로 우리를 실족치 않게 하신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여전히 많은 부분 연단과 고난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더욱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승리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고 그 승리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이것은 앞으로의 약속이 아닌, 이미 달성된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답답하고 암울해도 승리자다. 이왕 승리한 것, 좀 더 당당히 승리자의 모습으로 살면 좋지 않을까?

오늘도 화이팅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2013년 4월 16일 화요일

이삭의 우물들

 창세기는 참으로 다이나믹 하다. 하나님의 creative power와 그 속에 담긴 심오함이 드러나는 시작도 그렇지만 그 후에 나오는 인물들의 각기 다른 개성과 그들을 만지고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여실히 드러나는 책이어서 더욱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 인물들 중, 유독 밋밋한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이삭.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번제로 바치려 하는 극적인 순간에는 훌륭한 조연의 면모를 보였을런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 성경에 소개되는 그의 삶은 다소 심심한(?) 느낌이다. 극적인 하나님과의 대면도 없는 듯하고 그냥 그렇게 별다른 사건없이 살아가는 모습이랄까. 그런데 오늘 아침 창세기 26장을 묵상하면서 그런 이삭의 삶으로 부터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 역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상이나 느낌은 믿을게 못된다...ㅋㅋ 새롭게 글을 써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귀차니즘이 발동하여 같은 내용에 대해 이메일로 나눈 것을 그냥 여과없이 올리기로 했다...딱딱한 어투의 글만 가득한 블로그에서 개인적인 대화체의 글을 접하게 되는 것도 색다른 느낌일 수 있을꺼라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




 오늘 아침에는 창세기 26장을 묵상했는데요. 그 또한 은혜가 많이 되었답니다. 이모님과도 나누고 싶네요.
아브라함이 죽고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갈 생각을 했나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지 말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요. 그래서 이삭이 블레셋 그랄 땅에 거하게 되는데요. 결국 하나님의 복으로 큰 부자가 되죠. 모든게 좋아보이는데 갑자기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면서 그 곳을 떠나라고 해요. 그래서 이삭이 그랄 골짜기로 옮겨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우물을 파니 물을 얻게 되었죠. 그런데 질투가 난 그랄 목자들이 와서 다투며 그 우물이 자신들의 것이라 우깁니다. 그래서 주고,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또 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도 또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의 우물이라고 다투게 됩니다. 이삭은 그것마저 주고 다른 곳으로 옮겨 또 우물을 팠고, 그제서야 더이상 다툼이 없게 되었어요. 재미있는 것은 그 첫번째 우물의 이름이 '에섹'인데 그 뜻이 '다툼/분쟁'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 우물의 이름은 '싯나'인데 '미워함/증오'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더구나 두 번째 우물 '싯나'는 사탄과 그 어원이 같다고 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과정이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과 만나 함께 걸어가는 것과 참 비슷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세상은 이해를 못하고 미워하게 되요. 물론 처음에는 주님의 은혜로 잘 되기도 하지만 어느순간 갑자기 힘들어지고 모든 길이 막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그럴수도 있고, 상황적으로 그럴수도 있고, 또 정신적/감성적으로 그럴수도 있죠. 그래도 어찌어찌 이겨내서 더 나아가면 이번에는 미움과 증오가 나타나는 거예요. 사탄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니 여기선 더 힘들겠죠. 이 미움과 증오가 물론 다른 사람이 나에게 퍼붓는 것일수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 내면의 생각으로 상황이나 다른 사람에게 또는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가 이런 마음을 품게 되기도 해요.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 많이 일하거든요. 그런데 이삭이 한 걸 보면 거기에 대한 해답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인내하고, 포용하고, 용납하는 것이라는 거죠. 그냥 사랑으로 다 덮는 거예요. 힘든 상황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그리도 또 안 그러려고 해도 악한 마음을 품고 죄를 짓게되는 우리 자신까지도요. 그러면 언젠가 주님이 우리에게 세번째 우물을 주세요. 세 번째 우물의 이름은 '르호봇'인데 넓은 땅이라는 의미예요. 그 전에는 골짜기에서 아웅다웅 하면서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이기며 지나왔는데 이제는 엄청 넓은 땅이 떡하니 나온거죠. 이것만 해도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대박인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주님은 거기서 직접 우리를 만나주시고, 위로하시고, 희망을 주세요.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창 26:24)

 그저 참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되, 주님의 명령에 (세상의 기준으로 더 좋은 상황으로 보여지는 애굽으로 가지 말고 그 땅에 거하라 하신) 순종하면서 그렇게 하면 결국 우리는 세상도 이기고, 사탄도 이기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러면 세상이 우리를 통해 주님을 인정하게 되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 삶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자니라 (창 26:28-29)


 그래서 저는 그냥 이렇게 살아가려 해요. 상황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냥 끝까지 주님을 믿고 기다리며 가는거예요. 그러다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죠. 저는 그저 그런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가 되는걸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거구요.

 주저리 주저리 말이 길어졌네요...^^
 이모님이 많이 우울해 하시는 것 같아 저희도 많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같이 기도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꼭 극복하실 수 있는 힘을 주시리라 믿어요. 그저 모든 악한 생각은 사탄이 주는 거라는 걸 생각하시고 기도로 대적하시면 좋겠어요. 손 아프신 것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선포하시면서 기도하시길 원하구요.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고, 예수님께서 모든 질병과 죄를 대신해 해결하셨으니 나는 더이상 육체적인 질병과 마음의 병으로 고생할 필요가 없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하면서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선포하다 보면 분명 좋아지실 꺼예요. 선포가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포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더 실제적인 믿음이 되기 때문이예요. 힘드실때마다 그렇게 계속 선포하시고 희망의 눈으로 이모님과 상황을 보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이모님, 사랑합니다!!^^

2012년 7월 31일 화요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다른 어느때 보다도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인 것 같다.
매순간 세상과 상황에 타협하며 주님의 뜻과 생각을 드러내지 못함으로 힘들어 했었는데 그 또한 나의 믿음의 나약함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보게 된다.
믿음으로 나아가되 끝까지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실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 임하는 주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


2012년 7월 3일 화요일

아름다운 가정, 순결한 사랑 - 정원 목사님


지금 지나고 있는 내 인생의 여러가지 이슈들을 돌아보다가 정원 목사님의 이 글을 읽게 되었다. 정원 목사님의 글은 항상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적인 원리와 사랑에 대해 배우게 되지만 이번 글은 특히 더 내게 강하게 다가왔다. 두고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고, 새기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글이다. 이 땅에서의 천국의 삶을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우리의 부부 관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실현되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선 순위를 새롭게 세우고, 사랑의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내면의 성숙을 위한 가장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런지. 가정에서 시작 되고 바로 세워져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어 그 사랑의 깊이가 발전해가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인 원리와 법칙과 순서를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영이 깨어나고 성장할수록 그 사랑 안에서 깊은 연합과 사랑의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세월이 흐를수록 더 풍성한 천국의 실제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먼저 영적인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천국적인 것이며 바른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는 항상 행동이나 생각이나 감정에 앞서서 영적인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영은 상대방의 영을 느끼며 자기의 영과 상대방의 영이 서로 조화되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충분히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루 종일 예수의 영과 그 은혜에 대하여 생각하고 감동하게 되므로 그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 놀라운 은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는 오직 예수에 대해서 말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므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주님에 대하여 꼭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세상적인,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을 보아도 전혀 애정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외모가 아무리 예쁜 여자를 보아도 생명이 없는 인형이나 헝겊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것은 영적인 조화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성, 생각, 사고의 조화입니다. 누구나 삶에 대하여, 결혼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물질에 대하여, 우선순위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과 가치관에 있어서 같이 나눌 수 있고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감정의 나눔입니다. 마음 깊은 곳의 상처나 슬픔이나 즐거움이나 두려움이나 여러 가지들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대화를 통하여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깊이 알며 마음의 연합과 일치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단계가 지났다면 그 다음에는 육체적인 매력, 아름다움이나 매력에 끌리는지, 조화되는지..에 대한 것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실적이고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여러 상황이나 조건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영적인 것에서 일치되고, 정신, 마음에 대해서 조화되고 그 다음에 육체적인 면에서 조화, 그 다음에 환경적인 면에서의 일치와 조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영, 정신, 몸, 환경.. 이러한 순서는 우리의 삶 모든 면에 항상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영의 자극이 있고, [본인이 인식하던 못하던 간에] 그 다음에 생각이나 감동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악한 행동이나 중독된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행위보다 먼저 있었던 정신, 마음의 문제이고, 그보다 먼저 있었던 영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렇게 영으로 시작되어 마음이 따르고 육의 행동이 따라오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이 바뀌면 마음의 생각과 가치관과 감정이 바뀌며 행동, 삶이 바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을 고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중심 동기, 내면을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위는 자연히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연인의 애정, 부부가 되는 애정도 이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천국적인 것이며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는 것이 지옥적인 것이며 많은 문제와 재앙을 일으키는 시작이 됩니다.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사랑은 잘못된 애정의 순서를 잘 보여줍니다.

창세기 6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세상에 속한 여인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과정을 보면 이들은 상대방의 영적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의 수준에 대한 고려나 심장의 나눔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상대방의 외모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오직 육체의 상태, 육체의 매력에 따라 아내를 선택했습니다. 가장 나중에 고려되어야할 외적인 조건이 가장 먼저 고려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인류멸망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6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믿는 자들이 육체를 따라 사랑을 느끼고 애정을 갖고 결혼한 결과는 하나님의 임재의 소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시되었다고 여기고 떠나셨습니다. 남녀의 아름다운 연합,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고 누리고 그 안에서 깊은 사랑과 영혼의 발전을 누리고 천국을 누려야 할 연합이 가장 낮은 동물의 연합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영혼을 무시하고 육적 수준의 애정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들과 같이 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본능적이고 육적인 야합은 곧 홍수로 인한 옛 세상의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창세기 6장에 나타난 육적이고 낮은 사랑에 대하여 언급한 이유는 불행하게도 오늘날 남녀의 애정이 그 당시보다 나아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남녀의 애정과 연합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거의 배제되어 있으며 동물적이고 본능적이고 조건적인 것이 중요시됩니다. 성숙한 영혼에서 나타나는 아름답고 거룩하고 깊은 연합과 애정은 이 시대에서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집니다.



가정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며 사랑 안에서 성장해갈 때, 거기에서 천국의 향취와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부부가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서로를 섬기는 것을 기뻐할 때, 그러한 사랑의 연합 가운데는 천국의 영광과 임재가 있습니다.

부부가 친밀하고 깊은 배려와 애정이 담긴 대화를 나눌 때 거기에는 천국의 기쁨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애정을 담아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깊은 관심과 사랑스러움으로 그의 말을 경청하며 상대의 마음을 받아주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로 동조하고 덧붙이며 격려해줍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영혼의 기쁨과 아름다움과 행복감은 증가됩니다.

부부의 아름다운 대화는 마치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놀라운 하모니입니다. 영혼은 기도하고 찬양할 때 천국의 기쁨으로 가득해지지만 이처럼 애정과 배려가 가득 담긴 아름다운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영혼은 고양되고 힘을 얻습니다.

부부의 애정과 연합은 세월이 흐르고 영혼이 성장할수록 깊어지는 것이며 그 사랑의 연합은 꿀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거기에서 육체적인 부분, 성적인 부분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적습니다.

영혼이 어릴수록 육체를 통하여 만족을 얻고 보이고 느껴지는 것, 감각적인 것에 기쁨을 얻지만 영혼의 감각이 깨어나고 발전할수록 영혼의 교류와 나눔을 통한 깊은 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함께 있음으로, 대화함으로 같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영혼의 감각이 깨어날수록 육체가 주는 낮은 수준의 만족을 그다지 구하지 않게 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애정은 깊어지고 서로를 향한 이해와 감사하는 마음, 배려와 사랑의 고백은 깊어집니다. 그것이 성장한 영혼의 아름다운 부부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부부의 아름답고 깊은 사랑의 연합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성장해야 그에 걸맞는 사랑을 나누며 그에 걸맞는 아름답고 깊은 대화를 나누며 영혼의 교류를 통한 깊은 내면의 공감과 만족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기능이 자라나지 않으면 본능적이고 육적인 행위나 성적 흥분과 같은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며 눈에 보이는 선물이나 음식을 즐기는 것들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영혼이 어린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화는 폭력과 같은 것입니다. 말투는 거칠고 내용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말하는 사람은 공격적이고 날카로우며 상대방은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서로의 말에는 정죄와 비난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듣는 것에 서투르며 서로를 기쁘게 해주는 데 서투릅니다. 대화는 흔히 전쟁으로 이어지며 그렇지 않더라도 대화를 통하여 진정한 만족과 천국을 누리지 못합니다.

영혼이 어리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단점과 잘못이 보일 뿐이며 따라서 항상 말투에 가시를 담게 되고 정죄하게 됩니다. 서로는 서로의 말과 태도를 통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서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입으로는 주를 고백하지만 실제의 삶은 지옥같이 사는 이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명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영혼의 움직임과 주님과의 실제적인 교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깨어나고 성장할수록 상대방의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고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격려하고 축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화와 교제 가운데 천국의 은총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린 상태에서는 상대에게 오직 받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곧 실망하게 되고 상대의 잘못들이 아주 잘 보이기 때문에 비난하고 공격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빛의 시야는 눈이 멀었고, 어두움을 발견하는 어두움의 시각은 아주 예리하기 때문에 항상 불평과 비난과 정죄를 담게 됩니다. 말로 공격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영으로 분위기로 상대방의 기운을 죽이게 됩니다. 옆에 있는 것 자체로도 상대방을 숨막히게 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역사할 때, 우리는 쉽게 비난과 정죄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아무도 정죄당하기를 원치 않지만 우리는 자기도 모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도구가 됩니다. 물론 그것은 악한 영이 일으키는 영혼의 어두움이지만, 그 시작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애입니다.

자기 애정, 자기 연민, 자기 사랑에 빠진 이들은 아무도 마귀가 일으키는 혼미함과 어두움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항상 서운하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배우자의 단점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어린 영혼은 자아의 욕망과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천국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사랑과 헌신의 깊은 행복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자기 영혼의 비참함을 보지 못하고 그저 상대를 잘못 만나서 자신이 불행하게 산다고 여기며 배우자를 미워할 뿐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천국을 찾아보기 어렵고 부부의 사랑을 통한 영적 성장과 삶의 풍성한 행복을 누리는 이들이 드문 이유는 창세기 6장과 똑같이 그 사랑의 시작이 영의 끌림이 아닌 육체의 매력, 외적인 조건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멸망의 시작이지 천국의 시작이 아닙니다. 육으로부터 시작해서 영으로 마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의 내면, 그 마음과 심령의 상태에 대해서 거의 모르면서 외적인 매력에 빠지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주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아애로부터 나온 욕망이며 사랑이 아닙니다. 자아애는 얻으면 얻을수록 지옥으로 가득해지며 분노와 부족감으로 채워지는 것이며 나중에는 증오밖에 남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누군가 남이.. 배우자든 누구든.. 다른 이가 나를 사랑해준다고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란 영혼이 성숙하여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자신을 버려 남을 섬기고 기쁘게 해주고 사랑할 때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영혼이 어려서 남을 섬기지 못하고 받기만 원하는 이들은 점점 더 불안과 짜증으로 가득해질 뿐 원하는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이나 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여성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끼고 그녀를 얻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에서 흐르는 감동과 애정을 통하지 않은 성적 교류는 비극을 낳을 뿐입니다.

성적 매력과 자극을 통한 성관계.. 거기에는 영혼의 교류.. 마음의 교류.. 깊은 정서의 조화.. 나눔..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 앞으로 결혼할 사람에 대해서는 성적 관계를 가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혼전관계를 가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육욕의 충족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혼전 관계를 가지는 이들이 결혼생활의 행복을 기대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보혈로 씻김을 받고 이를 통한 마귀의 정죄에서 온전하게 회복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성찬식을 통한 사죄의 선언과 죄사함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불임이나 고통, 많은 후유증과 마귀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성향은 음란으로 가득합니다. 영적인 것들이 무시되고 육체가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음란을 즐기는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지옥적인 쾌락이며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에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으로는 영혼의 기갈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교류가 없는 성적 교류에는 무서운 후유증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영혼이 살아남고 싶으면 정숙하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성과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다니는 여성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바른 여성이 아닙니다. 그들은 남자를 타락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성들에게 성적 매력을 느껴서 관계를 가진 후에는 반드시 서로에 대하여 증오가 불타게 됩니다.

영혼의 교류와 나눔이 없는 성적 관계는 바로 재앙의 시작입니다. 영혼의 필요를 먹는 것으로 채우는 이들은 정신에 점점 더 많은 공허와 분노가 채워지게 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데, 그것을 육으로 풀려는 이들이 가는 길은 너무나 비참하고 끔찍한 길입니다.

여성들은 성관계를 갖자고 유혹하는 남자와 사귀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그 여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본능에 충실한 짐승일 뿐입니다. 영혼이 담기지 않은 육체의 행위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후회와 고통은 평생을 따라 다닙니다.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회개와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음란을 즐기면서 가정의 행복을 누리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정 천국의 기초는 순결입니다. 부부의 깊은 연합과 성장의 기초는 순결입니다. 몸과 마음이 순결하지 않으면서 천국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이 시대는 음란한 시대입니다. 영혼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을 보기 어려운 시대이며 오직 동물처럼 육욕을 강조하고 자극합니다. 오늘날 영상 매체에서 어린 여자 가수들이 벌거벗고 음란한 춤을 추는 것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돈과 성공을 위하여 시키는 짓을 하지만 이런 짓을 시키는 어른들은 심판대에서 중대한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섹시한 춤을 추는 것을 매력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유행이 되어 버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따라한다고 해서 그 파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섹시하다는 것은 칭찬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심하며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섹시란 부부에게서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보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지혜로움과 헌신과 그녀에게만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과 영혼의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그녀를 향한 자신의 깊은 애정을 사랑을 가득 담아 표현하고 싶을 때, 성은 아름다움과 헌신의 고백이 되며 그 성의 행위는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거룩한 연합이 있습니다. 영혼의 만족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불특정 다수인을 향해서 섹시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른바 섹시댄스를 추거나 한다면, 그것은 창기의 짓입니다. 그것은 동물과 같은 짓입니다. 아니, 동물도 그런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동물보다 못한 행동입니다.

많은 이성들이 자신에게 성적 충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재앙이지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행위로 인하여 많은 남자들이 성적 충동을 느끼고 자위를 하거나 또는 그러한 충동을 다른 피해자에게 표출할 때, 성적 충동을 일으키게 한 사람이 심판을 면할 길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그것이 스타가 되는 길이지만 영계에서 그들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무지로 인하여 악들이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들이 부끄러움을 잃어버릴 때, 이미 그 영혼은 파괴된 것입니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배를 드러내고 가슴을 드러내고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여성들의 영혼은 이미 정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을 동물로 만들고 쳐다보는 남자들을 짐승으로 만듭니다.

그러한 충동에서 시작되는 사랑은 불행합니다. 그것은 정욕이고 사랑이 아닙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불행합니다. 벗고 다니는 여성들의 결혼생활을 지옥과 같으며 행복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매력은 오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 연합은 반드시 후회를 일으킵니다. 육체의 흥분과 매력은 곧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은 서로 부딪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원수처럼 싸우며 점점 더 마음이 외로워지고 혼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들은 쉽게 바람이 납니다. 나이가 있는 사람의 그 바람은 육체의 정욕에서라기보다 영혼의 허무와 외로움으로 인하여 반복됩니다. 그리고 되풀이될수록 그 영혼의 상태는 더욱 더 비참해집니다.

용기가 있는 이들, 행동에너지가 많은 이들은 실제로 바람을 피고, 용기가 없고 행동에너지가 없이 생각에너지나 감성에너지만 많은 이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의 배우자가 저런 이성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면서 삽니다.

흔히 신자들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상상의 죄입니다. 사람들은 상상으로 간음을 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상하는 것도 죄입니다. 현실에서 허락되지 않은 것은 상상에서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몸이 배우자와 성행위를 해도 마음이 다른 대상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간음입니다.

신자들도 자위를 많이 합니다. 내게는 이러한 도움을 구하는 요청들이 많이 옵니다.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메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성을 침상에 끌어들이는 것은 상상 속에서도 죄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 그러한 상상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는 소멸됩니다. 

자위는 질병입니다. 죽을 죄는 아니지만 영혼을 병들게 하는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치유하고 해결되어야 합니다. 성적 자극을 주는 것을 멀리하고 음식을 조절하며 영혼에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며 보혈을 주장하고 성령 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이러한 연약함들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음란성은 이 시대의 흔한 증상입니다. 그 근본이유는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병들고 마비되어 있으면 그들은 영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영과 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내면을 보지 못하므로 오직 외모에 치중하게 됩니다. 여자들은 꾸미고 성형을 하며 남자들은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를 찾아다닙니다. 그러한 만남과 결혼은 시작부터 재앙과 지옥을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욕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 몸의 감각을 중시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인생의 큰 기쁨으로 여기는 이들은 낮은 영역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영계의 깊은 행복에 대해서 모릅니다. 지혜와 진리의 기쁨, 순결한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나오는 초자연적인 평화와 행복감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이들은 성욕도 절제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짐승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본능적인 삶의 이유는 이들의 영혼이 병들었고 마비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영혼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오직 육욕을 구하며 마음은 황량하여 외롭고 허무하며 마음이 바쁘고 쫓기고 거칠고 사납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영혼의 깨어남을 모르고 영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모르며 육체에 매여서 죄에서의 해방을 모르고 변화된 삶이 없는 이들이 오늘날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깨어나지 못하면 육체의 정욕을 따라 동물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으며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 그 지혜가 무엇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영혼의 무한한 성장이 가능한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더 비참한 일입니다.

영혼이 깨어날수록 인간은 사랑의 기능이 발전하며 지혜의 기능이 발전합니다. 이들은 점점 더 사랑의 속성이 깊어지며 더 섬세하고 깊이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섬깁니다. 이들은 아름다우며 겸손하여 온유하며 친절합니다. 이들은 점점 더 많은 천국의 행복감을 느낍니다.

나는 가까운 이들과의 모임에서 부부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자주 훈련시킵니다. 서로 그리워하는,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선과, 사랑의 고백을 하도록 격려합니다. 한 부부씩 수줍게, 아름답게, 즐겁게 사랑을 고백하고 좌중은 웃음과 환호와 박수가 가득합니다. 부부는 서로 감사와 사죄의 고백을 하고 서로 용서를 나눕니다. 서로 사랑스럽게 포옹하며 남편은 아내를 업어줍니다. 어떤 이들은 울고 어떤 이들은 웃습니다.

신자들은 교회와 모임에서 사랑에 대해서 배우고 훈련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배운 것을 실천합니다. 사역자의 역할은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강대상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삶에서 사랑의 본을 보여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고 훈련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나는 자주 부모와 자녀들을 불러 서로 사랑과 용서의 고백, 감사의 고백을 시킵니다. 부모가 자녀를 안아주며 업어줍니다. 이러한 터치와 애정의 표현은 자녀를 건강하고 지혜롭게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를 안아주는 것입니다. 공부하라고 100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이를 한번 안아주는 것이 더 아이를 지혜롭게 하고 심장을 충만하게 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안아줌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엄마의 안아줌이 충분하면 남자들은 자라서 포르노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아빠의 안아줌이 충분하면 여자들은 자라서 벗고 다니고 음란한 춤을 추지 않으며 이성에게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한 증상들은 다 영혼의 허무함 외로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중독도, 식탐도, 자위도.. 다 외로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터치가 부족하면 사람은 외로워집니다.

성중독은 아무리 많은 성을 경험해도 치유될 수 없는데, 그것은 현재의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안아줌, 엄마의 살, 아빠의 품을 그리워하는 내면의 아이가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면의 아이를 치료하고 만족시켜야 그러한 증상이 사라집니다.

영혼과 가슴이 동반되지 않은 성을 경험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비참해집니다. 욕망을 다 이루지 못하면 아직까지는 안전하지만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나면 끝에는 자살밖에 없습니다. 그게 육의 본능으로 사는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악령들은 최후의 목적지로 자기가 평생 끌고 다닌 희생자를 데리고 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주를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고 섬길 때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낍니다. 동물은 동물같이 살아도 고민이 없지만 사람은 동물처럼 살 때 결국 미치고 죽게 됩니다.

나의 가까이에서 교제하고 있는 이들은 이제 어느 정도 천국의 기쁨에 대해서 압니다. 만남이 있을 때 항상 천국의 기쁨이 있고 웃음과 행복감과 사랑의 고백과 영적 충전이 있습니다. 그들의 가정은 천국과 같으며 이들은 자주 아이들을 안아주고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이들 중에 아무도 섬김을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다른 이들을 위하여 순수하게 섬기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들은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천국의 교제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의 기쁨을 알면 지옥의 불결함과 거칠음과 어두움의 악취를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세상의 쾌락으로 인하여 악취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깥에서는 긴장하고 깨어있어서 전쟁을 치러야 하지만 천국의 교제 안에 들어올 때 사람들은 다시 회복되고 치유되며 웃음과 기쁨과 행복감 속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은 본래 기쁘고 행복하도록 창조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서로 순결하게 사랑하고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나 공동체에 문제들이 많이 있고 갈등이 있는데 그 원인은 항상 같습니다. 그것은 어린 영혼의 상태에서 자기애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자기애를 통해서 지옥이 확산됩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육체의 정욕과 자기애 때문입니다.

자기애가 가득한 어린아이는 자기가 수고했는데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할 것입니다. 불평할 것입니다.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을 때 혼자 주저앉아 있을 것입니다. 자기보다 남이 더 사랑을 받는다고 시기하고 질투할 것입니다.

억울해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높임받기를 원하며 쉽게 기분나빠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지옥의 이러한 모든 기운들이 다 자기애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영혼들이 자신이 자기애로 가득한 지도 모르며 자기애가 지옥에서 오는 것인지도.. 죄인지도.. 지옥의 함정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기애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스스로 만든 감옥이기 때문에 본인이 깨닫고 원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들을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오늘날 천국의 공동체가 흔하지 않은 것은 육체의 정욕과 함께 이러한 자기애가 충만하여 죄를 가벼이 여기고 정화를 사모하지 않으므로 집회와 모임 가운데 불결함이 있고 자아의 악취가 가득하여 주님이 임하실 수가 없으며 그러므로 천국의 향취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자기애에서 나오는 악취를 분별해야 하며 그것을 권면하고 처리해야 합니다. 자기애가 사라져야 주님이 임하시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천국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내가 가까이서 돌보는 영혼들은 어린아이들을 합하여 불과 60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많은 이들이 가까이서 교류하고 싶어하지만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게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 이들은 아주 많지만 영혼의 성장을 구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성장을 위하여 죄와 자아에서의 해방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으며 낮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드러나고 싶어하며 편안한 삶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며 그저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오래 동안 같은 영적인 위치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정화와 성장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며 고통도 즐거이 감수해야 합니다. 고통을 싫어하는 것은 벌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성장을 갈망해야 합니다. 순결한 사랑을 갈망해야 합니다. 천국의 기쁨을 사후에 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성장할수록 그들은 천국에 가까우며 천국의 향취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천국에 속하고 주님께 속한 이들의 대화에 항상 웃음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쳐다보는 눈길에는 애정과 경외감과 감사함이 가득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포옹하고 감사하고 발을 씻기는 이들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부부들은 눈빛만 보아도 서로 모든 것을 알고 나눕니다.

슬픔이 있을 때 아내는 남편 앞에서 울고 남편은 아내를 지극한 애정을 담아 안아주고 위로하고 축복합니다. 아내는 곧 회복되어 웃음과 기쁨을 누립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 사랑의 천국이 발전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배우자가 잘못되어서 그러한 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문제는 항상 자신에게 있습니다. 아무도 배우자로 인하여 불행하지 않고 자신으로 인하여 불행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불신으로 지옥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쪽이 어리면 다른 쪽이 업어주면 됩니다. 영적 나이는 남녀노소가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가 칠십이 넘었어도 자기애가 가득한 아가가 있고, 나이가 십대라도 영혼이 성숙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역자가 자기애로 가득한 아기인 경우도 있고 신앙연륜이 어린 사람이 성숙한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애의 어린아이는 항상 불평하며 남의 탓을 하며 원망하며 자기를 변호하며 억울함을 호소할 것입니다. 어른은 항상 상대방을 아름답게 여기고 상대의 짐을 져줄 것입니다. 나이와 직분에 상관없이 성숙한 사람은 어린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놀아주며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상대가 아무리 어려도 자신이 성장해있는 사람은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른은 아기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가가 앵벌이를 해서 자기를 부양하기를 기대하는 어른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싸우면서 자랍니다. 형제들끼리도 그들은 싸웁니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서로 원수진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가 자기애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애는 서로 충돌합니다.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고 싸우는 것은 영혼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발전하지 않으면 사람은 사랑이 어렵습니다. 육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 뿐 순결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순결한 사랑은 영혼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있는 것은 영혼의 시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상대의 영혼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경은 경치를 볼 수 없습니다. 경치가 좋아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세상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눈을 뜨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그가 영적인 소경이 되어서 사랑에 속한 것을 볼 수 없으며 사랑스러움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아름다움의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진선미를 좋아합니다. 진실을 좋아하고 공평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며 선한 것이 좋은 줄을 알고 악이 잘못된 것을 알며 미를 좋아하고 추함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지 않았다면 그를 아름답게 보아주는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언젠가는 예수의 피에 대해서 배우게 되며 영혼이 깨어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영혼들은 깨어나고 변화됩니다. 문제는 영혼이 무시되는 이 시대에 영적 어린아이들은 도처에 가득한데 아이를 사랑으로 키울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아이는 사람의 겉 행위만 보기 때문에 정죄할 뿐입니다. 그러나 영적 어른은 사람의 내면을 보므로 정죄하지 않고 치유합니다. 게임중독도, 성중독도, 탐식도, TV중독도.. 쇼핑중독도.. 대부분 영혼의 외로움에서 시작됩니다.

어린아이는 그것들을 정죄하지만.. 하루종일 비난하며 잔소리를 퍼붓지만.. 그리하여 증상이 더 심해지지만.. 어른은 그 영혼의 고독을 알므로 측은히 여기고 안아주며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지만, 어른이 있는 곳에는 항상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고 변화된 삶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숙은 그것은 사랑의 질, 열매로 나타납니다. 성숙한 사람에게는 천국의 향취가 있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안식을 누리기 원합니다. 불신자들도 그들에게 나아가 그 평화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것이 성숙이며 신자의 표식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불신자들도 그것을 알아봅니다.

그러므로 배우자에게 기대하지 말고 당신의 성장을 구하십시오. 당신이 자기애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감옥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면 탐식의 노예에서, 음란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육체를 제어하고 자아애를 제어할 때 누구나 영혼이 깨어나 영혼에서 나오는 아름다움과 기쁨,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순결한 사랑을 꿈꾸십시오.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십시오. 배우자에게 부드럽게,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아이들을 자주 안아주십시오. 아이들에게 자주 뽀뽀를 해주고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그것이 최상의 교육입니다. 학교와 학원에서 망가진 아이들이 집에 오면 회복이 되게 하십시오.

학교와 학원은 합법적으로 영혼을 파괴하는 공간입니다. 이 시대의 교육은 아이들을 자살과 파괴로 인도하는 시스템입니다. 아이들이 괜히 음란과 폭력게임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갇혀 있는 아이를 사랑으로 위로해주십시오.

당신의 가정이 천국이 되게 하십시오.
아름답고 깊은 사랑을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당신의 배우자처럼 아름답고 귀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들은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그 귀한 선물들을 사랑을 가득 담고 안아주십시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안아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영혼의 사랑을 갈망하십시오.
당신의 내면이 사랑으로 가득해져서 말과 표정과 몸짓과..
모든 것에서 그 사랑이 흘러나오게 하십시오.

결혼생활이 길어질수록 아름답고 깊은 사랑의 대화를 나누십시오.
부드럽게, 아름답게 말하고 깊은 주의를 기울여 상대의 말을 경청하십시오.
제대로 듣지 않는 것에서 마음의 연합이 실패하고 많은 고독과 상처가 시작되며
충분히 듣는 데서 많은 아름다움이 시작됩니다.

배우자가 아기이면 업어주십시오.
정신적으로 아픈 데가 많으면 불쌍히 여기고 격려해주십시오.
사람은 욕하고 때려서 변화되지 않고 안아주고 울어줄 때 변화됩니다.

배우자가 당신 앞에서 울게 하십시오.
눈물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터뜨리고 싶은 많은 분량의 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우자가 울고 당신이 그를 안아줄 때 그것은 곧 아름답고 놀라운 연합입니다.

천국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그 천국의 향취를 갈망하고 사모하십시오.
천국의 기쁨은 영혼에서 오는 것이며 돈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그 천국의 기쁨과 영광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천국, 아름다운 사랑, 순결한 사랑이
당신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은 그 천국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에서, 육욕과 자아애에서 벗어나 순결한 사랑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에게 말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garden500/CjcF/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