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주님 안에서의 자유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렘 34:17

우리는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그 자유는 '주님 안에서의 자유'이어야 축복임을 깨닫는다.
만일 그 자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자유'라면 그 자체가 저주이자 고난이다.
지금 내가 꿈꾸는 자유는 100% '주님 안에서의 자유'인가?

2011년 12월 9일 금요일

거룩하라!!

지난 주일 찬양을 하는 가운데 주신 감동이 있었다.
투명하고 날이 잘 선 검을 보여주시며 사람들을 묶임에서 풀어주는 영적인 검이라 하셨다.
그리고 주시는 강한 감동은 '거룩하라!' 였다.

요즈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의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나 혼자 도닦듯 기도하고 말씀읽고 하는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통해, 그리고 성령으로 인한 열매 맺음으로 인해 주변 사람에게 영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그런 신앙생활을 강조하시는데 이번에는 나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그런 행동의 첫걸음이라는 것이었다.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영적인 검이 있다면, 그 검이 날카로워지고 칼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부지런히 그 칼날을 갈아 녹슬지 않게 관리할 때이다. 우리의 영적인 검이 우리에게 맡겨진 다른 영혼들을 묶고 있는 악한 영들의 기운을 베고 끊어 그들을 자유케 하는데 쓰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선 칼이 녹이 슬면 제대로 밸 수 없게된다. 너무 관리가 안되어 있다면 베는 것은 커녕 그저 튕겨나올 뿐이겠지만 어설프게 날카로운 정도라면 온전히 베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서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사람들을 자유케 하려는 나의 시도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는 경우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인가? 그렇기에 우리의 거룩함을 유지함으로 죄로부터 멀리하고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나의 성품적인 나약함이 성령 충만으로 제하여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날카롭고 투명한 영적인 검을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온갖 화려한 초식을 구사하며 휘두르지 않더라도, 잘 관리된 그 검은 모든 묶인 것을 베고, 자유함을 줄 수 있는 명검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그 과정 속에서 나도 자유케 될 수 있는 그 검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성령의 검은 말씀으로 나타난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서의 말씀이라면 그저 내가 살아가는 상황속에서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음을 받고, 나의 행동과 태도를 교정하며 취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씀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으려면 그 말씀이 말씀 자체로 머무르는 것을 넘어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 아니던가.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 야고보가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삶을 통해 말씀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였기 때문이라 믿는다.

내 삶의 거룩함을 이루고 지키기위해 조심하고, 분별하고, 노력해야 겠다. 악한 원수 마귀들이 교묘히 설치해 놓은 덫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조심하고, 상황으로 다가오는 문제와 고난들의 뒤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의도를 꿰뚫을 수 있도록 분별하고, 그런 상황과 맞닥뜨린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훈련의 목적을 깨달아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계속해서 같은 문제들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리고 내 안의 똑같은 연약함이 지속적으로 드러난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계시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던 김길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훈련은 문제를 통해 남을 바라보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내면을 조명하고 감찰하면서 내 안에서 제하여야 할 것들을 버리고 성령의 충만으로 채우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계속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거룩을 유지하는 길일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맺어진 성령의 열매를 나누는 것이 바로 사람들을 묶임에서 놓이게 하는 검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정말 하나님께 집중 과외를 받는 듯한 느낌이다. 지속적인 문제들이-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가지의 문제들이-계속해서 터져나오고 나를 뒤흔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의 마음의 어려움을 겪은 후 얻게되는 결론이 결국 이 모든것이 내 안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 감사할 일이다. 2011년을 얼마 남기지 않는 지금도 내 앞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런지 감도 안 잡히는 일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다가오는 걱정과 두려움 뒤에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깨닫고 스스로를 바꾸길 원하시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감사와 평강과 희망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아프지만 감사한 요즘...
내일은 또 어떤 문제로 나의 내면이 만져지고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갈 기회가 주어질지 조심스런 기대를 해본다.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포기할 것이냐?

돌아보면 참 핑계가 많은 삶이었다.
나는 늘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또한 그걸 핑계로 나 자신을 괴롭히며 살아온 것 같다.
거의 모든 시간을 실험실에서 일에 쫓기며 살아오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 당연히 삶의 패턴이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일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듯한 교수와 labmate들을 보면서 그들보다 상당히 적은 시간만을 일에 할애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일터에서 힘들었던 그런 삶이었다. 그렇기에 일이 맘대로 안풀리는 것 또한 내가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데서 이유를 찾으려 했었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속으로 나를 몰아가고 있었다.

주님께 더 나아가고, 더 경험하면서 그런 문제들로 부터 조금씩 자유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일에서는 많이 자유를 찾았지만 이제는 신앙적인 문제가 더해졌다.기도도 해야 하고 말씀도 읽어야 하는데 그런 일들을 하려면 나의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포기할 수 없기에 결국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일하는 시간을 더 줄여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물론 와이프와 아들 녀석이 잠든 후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 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늘 나는 너무 피곤하기에 도저히 집중해서 말씀을 보고 기도할 수 없다는 핑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다보면 자연스럽게 던져지는 질문이 내가 여기에서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Academia와 research를 고집하지 않고 회사가서 일하다보면 재정적인 문제도 풀릴 것이고 정해진 시간동안 일하면 되는 규칙적인 스케줄이 될 터이니 일에 묶이게 되는 것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될 터인데 왜 이렇게 힘들게 여기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과연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지금 내가 믿고 있듯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런 저런 고민에 시달리던 중 하루는 그냥 도서관에 가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이런 저런 회사들도 살펴보고, 다른 연구 그룹들도 보고, 만화책도 보고...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섞인 방황의 시간이었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런지 모르겠다. 막상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긴 했지만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너무나도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 있었다.

포기할 것이냐?
너는 그렇게 이런저런 핑계로 나를 포기할 것이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정말 나의 상황이 허락치 않는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로 주님과의 관계를 다른 일들 뒤로 미루어 놓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늘 고백하듯이 나의 생명되신 주님이라면 그분과의 시간을 그렇게 미루고 살지는 않았을텐데...

그날 이후 와이프와 승혁이가 잠든 시간부터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시작했다. 대부분 12시, 1시가 넘는 새벽 시간에 시작되기에 기도하다가 졸고, 말씀 보다가 졸기도 하지만 쉽게 멈출수가 없다. 너는 그렇게 나를 포기할 것이냐는 주님의 음성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나의 심령에서 들려오기에...물론 시간이 모든것을 보상할만큼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셨던 그 의도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걸 깨닫는다. 상황에 굴복하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정당화 하던 나약한 믿음...십자가가 우리의 내면에 선명하게 새겨질수록 우리의 삶의 비중은 주님께로 더 가까이 옮겨질 것이다. 내가 얼마만큼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다. 그저 우리의 하루 일상을 돌아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얼마나 그 분을 생각하며, 묻고, 의지하고 있는지.
나의 열심이-비록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일이라는 허울좋은 이유를 스스로 붙이더라도-어느덧 주님과는 상관없는 나만의 열심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멀어지고 나의 생각과 의지와 열심에 매달리게 될 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 뜻대로 일들이 풀려나가지 않을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께 원망섞인 푸념을 늘어놓으며 도망치게 된다. 도서관에서 빈둥대던 그날의 나도 그랬듯이.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것이 정말 큰 죄악이라고. 정말 큰 불순종이라고!!!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22:12-14

나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봤을때 밀려오는 실망감으로 주님을 원망하고 나의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태도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허무함만 줄 뿐이고, 하나님께는 죄악이 될 뿐인 것이다. 힘들고 마음이 어려울 때, 우리는 그 순간에도 이글거리는 불타는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주님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힘들다고 나를 포기할 것이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것만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좋은 것들은 대부분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좋은 것이고 지금의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좋은 것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러한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께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사 30: 9-10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경우 기다리라 하신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계획하신 뜻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 위해, 또 우리가 그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제대로 된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 기다리라 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이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축복이 바로 기다림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 30:18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주님의 그 분명한 음성을 기억한다면...
"나를 포기할 것이냐?"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 나를 두고 상황에 밀려 도망하는 것이냐?"
그 음성을 기억한다면 힘들어도 다시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그 뜻을 따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신실하신 주님을 믿기에...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기에...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 분의 사랑을 알기에...

2011년 12월 3일 토요일

고난의 이유: 김길 목사님의 '증언' 중에서

고난의 이유

고난이 오면 가장 먼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고난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고난을 이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난이 오면 마음이 어려운 상태라서 생각이 온전하기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생각은 대부분 마음을 낙담되게 하고 믿음이 없어지게 한다.
 욥기의 중요한 주제는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이다. 욥의 세 친구는 고난의 원인을 욥의 죄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 친구는 욥에게 죄를 회개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한다. 하나님을 만나서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는 결국 회개해야 했다. 물론 욥도 회개해야 했다.
 고난의 원인이 나의 죄라고 여기면 생각이 비뚤어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나의 죄를 세고 계신 분이고, 그 죄에 합당하게 고난을 주어 나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아는 것이다.
 고난이 올 때 그 원인을 찾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보통 그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욥의 부인이 그런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욥이 고난받고 있을 때 욥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8,9)

 보통 우리는 고난이 오면 그 원인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한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거나 적어도 막아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진정한 환란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간다. 내 믿음이 없어지고 원수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욥이 고난을 멈추게 하려면 믿음을 보여서 원수가 물러가게 해야 한다.
 고난은 멀쩡한 사람도 욥의 부인처럼 만든다. 고난이 올 때 넉넉히 이기는 사람을 잘 보지 못했다. 누구나 고난은 어렵다.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고난의 작은 모습만 보아도 그 고난이 장차 자기를 어떻게 괴롭힐지 알기 때문이다. 누구도 고난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예수님도 고난받으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예수님도 겪기 힘드신 고난을 어찌 우리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이길 수 있겠는가....
 고난은 잘 통과해야 한다기보다는 인내로 버텨야 하는 것이다. 고난이 오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정말로 깊은 고난에 빠지면 가족을 비롯해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하나님 앞에 혼자일 뿐이다. 고난이 올 때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어려워지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실망해서 그렇다.
 오직 나를 고난에서 건질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인줄 알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유일하게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인데 내 마음이 강퍅해져 있으면 기도도 나오지 않고 원망만 나오게 된다. 마음이 원망으로 가득하니 믿음이 있을 리 없고, 믿음이 없으니 역사가 일어날 리 없다. 모든 일은 우리의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원망하는 것이다. 원망함으로써 믿음이 없어지고 고난은 해결되지 않고, 우리는 사망을 향해 가게 된다.
 고난이 올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원망은 절대 안된다. 호소해야 한다. 어려울 때는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호소하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나요?' 하고 섣불리 묻지 말라.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호소해야 한다. 이 고난에서 벗어나도록 믿음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단지 그 고난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있음을 알 뿐이다. 이것이 가장 빠르게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다. 엄청난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기도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평상시 작은 고난이 왔을 때 잘 훈련해야 한다. 이유를 묻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배울 것을 배워야 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모든 사람이 인생은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인생이 뭐가 재미있기만 하겠는가. 어차피 인생은 고생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복되다. 고난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고난은 재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친해지려면 예수님의 핵심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정서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 고난을 이해할 때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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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피플에서 e-book 서비스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김길 목사님의 '증언'이라는 책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예전에 말씀 몇 가지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기에-물론 공짜 좋아하는 나의 근성이 크게 한 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얼른 다운 받아서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참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고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수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이 울었다. 김길 목사님의 간증의 내용이 감동적인 것도 있었지만 비슷한 상황을 통해-나의 고난이 목사님의 고난과 비할바 못되겠지만-나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나의 심령에 울려퍼짐으로 회개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은 분명 고난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통해 성령 충만을 힘입어 나의 내면이 변화되어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의 원인을 묻기 전에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만들어 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열매를 맺은 것이 고난의 끝을 알리는 그 순간이 될 것이기에...


주님 저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그 열매를 맺길 원하나이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