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와이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제와 나눔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헌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를 통해, 성경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구제에 대한 내용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고, 나눔의 삶과 우리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던 중, 자연스럽게 그런 삶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마음보다 자신의 욕심이 앞서게 되는 경우, 우리는 당연히 구제와 나눔의 삶을 살 수가 없게 된다. 세상에는 우리의 욕심을 자극할만한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 우리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고, 세상적으로 좋은 것들에 대한 욕심을 부추긴다. 이러한 욕심들은 나눔과 구제의 삶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요소라는 것도 사실이다. 문득, 얼마전 누가복음을 읽어나가며 나중에 시간 날 때 묵상해봐야 겠다고 적어둔 구절이 떠오른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니라
눅 11:34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온 몸이 빛의 거함으로 밝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온 몸을 밝히는 빛이 바로 우리의 눈이라 하셨다. 눈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창이다. 눈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또한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밝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로인해 우리의 내면이 온전히 밝음 속에서 거하게 되는 반면,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둡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두움의 세력의 영향력에 들어갈 것이고 우리의 내면은 어두움의 속성에 의해 이끌려갈 것이다. 비판, 정죄, 두려움, 낙담, 낙심, 우울, 실망, 혈기, 욕심, 시기, 질투 등...이 모든 어두움의 속성을 지닌 요소들은 직간접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보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고, 또한 우리의 눈에 주님의 빛이 거하여 자연스럽게 영적인 어두움의 세력들을 걸러내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도, 결국은 그 보암직하고 탐스러운 것을 통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 우리의 눈은 결국 빛으로부터 감기고, 어두움을 향해 떠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이렇듯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등불인 눈을 잘 지키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할 것이다.
오늘 신명기 말씀을 읽으며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신 25:17
죽음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두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하신 은혜들과 지켜야 할 율례들을 전하던 중, 난데없이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는 내용이 나온다. 갑자기 왜 아말렉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던 중,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http://old.saemoonan.org/02_wship/print_preaching.php?index=1223&sort=weekend).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결국 진멸하라는 뜻이다. 아말렉은 애굽으로부터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으로 공격한 전투에 능한 족속이었다. 모세는 이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해가 지도록 지팡이를 들고 있어야 했다.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도, 경외함도 없었던 이 족속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전해 왔고, 더구나 지쳐서 뒤떨어진 약자들을 치는 전술을 택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은 아말렉을 진멸하겠다는 단호한 뜻을 모세에게 전하신다. 19절의 '잊지 말지니라'라는 구절이 하나님의 확고하신 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과 우리의 눈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사울에게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을 명하셨고 사울은 곧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아말렉을 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 진멸한 것이 아니라 가치없고 하찮은 것들만 없앴을 뿐 아말렉의 왕 아각과 그의 좋은 가축들, 그리고 모든 값진 물건들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겼다. 사울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사울이 그렇게 살려둔 아각의 자손 하만은 훗날 모르드개를 비롯한 모든 유다인들을 페르시아에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따르지 않은 사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자신의 자손들에게도 위협의 요소가 되는 원인을 남겨놓게 되는 것이다.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눈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늘 주님의 음성을 듣길 간구한다. '주님 주님의 생각을 알길 원합니다. 제가 순종함으로 나아가겠습니다.'라고 간청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의 눈을 통해 도전해 오는 세상의 욕심을 누르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눈은 우리 몸의 등불이라 하셨다. 우리의 내면을 주님의 빛으로 밝혀주는 등불이라 하셨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갈구하고 꿈꾸는 것보다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면 우리의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봐야 할 것이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불을 꺼지지 않게 잘 관리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우리의 몸의 불을 잘 관리하는 것이 우리가 주님께로 온전히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눈이 우리 몸의 등불이라 하셨음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요즈음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의 눈을 통해 나의 생각과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나의 눈은 나의 육적인 삶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에 있어서의 필터로서의 작용을 잘 하고 있는 것인가? 나의 관심사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