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9일 목요일

찬양과 경배의 삶

요즈음 밤에 승혁이를 재울때면 이런 저런 기도를 많이 해주려고 한다. 주로 대적기도와 축복기도를 해주면서 재우는데 비몽사몽간의 상태에서 깊이 잠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에 일단 잠들기 시작할때까지 기도해주고 그 후에는 잠시 나혼자 기도를 하며 기다리곤 한다.
며칠 전에도 같은 패턴으로 기도해주면서 재우다가 슬슬 잠이 드는 것 같길래 다른 기도를 시작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찬양할때는 온전히 주님을 높여드리며 경배를 드리는게 상대적으로 쉽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 혹은 홀로 기도할 때는 형식적으로 내뱉게 되는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 말고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감사드리는게 너무 없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래서 그냥 다른 것 생각치 않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 하고 있었는데 5분이 조금 지났을까 하는 시간부터 갑자기 알 수 없는 기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얼굴은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내 심령속에 평온한 기쁨이 밀려오는 것이, 세상이 주는 그런 기쁨과는 분명히 다른 기쁨이요 행복이었다.

그 기쁨과 행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왜 나의 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만으로도 그렇게 기뻐했을까?

문득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학교에서의 기도 모임에서도 다른 친구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다 세상적인 비전에 대한 것이었다. 일과 개인적인 삶 (가정)의 balance, 지금 나의 자리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것 등등. 하지만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삶의 목적이나 또는 하나님 안에서의 비전의 문제들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지 않을까? 내가 요즘 생각하는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함으로 높여드리는 것,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 이렇게 크게 두가지이다.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 (building up relationship with God)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두가지는 그 관계가 형성되면 당연한 나타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선 잘 알아야 한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의 육체적 / 정신적 상태는 어떠한지 등등...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지금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바람직한 관계는 어느 한 사람만 잘 알아서 공급해 주는 일방향성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양뱡향성의 관계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설사 많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얼마나 더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예수님은 어떠한 눈에 보이는 행위로 (심지어 그것이 주님을 부르며,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라 해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음을 확실히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함으로 인함 보다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나님과의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할 때, 우리가 다른 어떠한 것보다 하나님께 더 관심이 있음을 보일 때 우리를 더 기쁘게 받아주신다. 분주하게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움직이던 마르다를 뒤로하고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에게 그러하셨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에게 그러하셨다. 과연 그들의 그당시 마음 상태는 무엇이었을까? 오로지 지금 눈앞에 계신 예수님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다른 어떠한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나아가다 보면 그 분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삶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인 동시에 그런 하나님을 더 알리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한 삶이 되지 않을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삶이어야 한다. 단지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두 팔 벌려 찬양할 때만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매순간 그분을 생각하며,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고민하는 것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삶이기에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기도를 드릴 때 나의 영이 그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흔히들 놓치게 되는 것이, 무엇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 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찬양과 경배는 못하겠네요. 나중에 제가 상태가 좋아지고 주님께서 크나큰 기도 응답과 축복을 주셨을 때 감사드리고, 찬양하고, 경배할께요.'라고 고백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말 그대로 우리의 주님이기에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때 오히려 우리에게 기쁨이 생기고 영적인 힘으로 채워질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여러가지 일들로 분주해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는가?
고민이 너무 많아서, 정신적으로 지치고 힘들어서 그저 쉬고만 싶고 영적인 생활은 잠시 접어두고 싶은가?
육체적인 피로로 인해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자고싶고, 쉬고싶은 생각 뿐인가?
그렇다면 그 순간이 다른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 다른 어떠한 해야 할 일들도 내려놓고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그분께 사랑을 고백할 시간일 것이다.
그런 고백의 시간을 통해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면 우리의 영이 기뻐 춤추고, 영적 돌파를 일으킬 수 있는 힘도 회복될 것이니 말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높여드립니다!"

2011년 9월 20일 화요일

눈물이 있는가?

나의 삶에 있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종종 찾아오는 낙심과 낮은 자존감의 공격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 삶에서 아무런 기쁨도 열정도 찾기 힘든 날들이 가끔씩 나를 주저앉히곤 한다. 대부분 경제적인 부담이 느껴질 때, 일에 있어서 너무나도 오랫동안 진전을 보지 못하고 실패가 계속 될 때, 가장으로서 우리 가족들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함을 느낄 때,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과 또한 휴식의 시간이 없음으로 인해 극한의 피로를 느낄 때 이런 무기력의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 것 같은데 일단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마음 상태에 들어서게 되면 헤어나오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나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들이 힘든 상태에서 바닥을 한 번 치고서야 겨우 조금씩 회복이 되곤 한다. 며칠 전에도 이런 상태가 찾아와서 힘들어 하고 있었는데 문득 바울의 고백이 떠올랐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바울은 어떻게 해서 모든 상황에서 만족하고 자족할 수 있었을까?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했을때 주신 감동이 바로 '그는 많이 울었다...'라는 것이었다.

울었다고? 나에게 있어 바울의 이미지는 강인함과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의지와 열정이 있었고 진리를 설득력있게 말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었기에 강하고 이성적인 이미지가 일종의 선입견으로 내게 들어와 있었나보다. 그렇기에 그가 많이 울었다는 말은 선뜻 와 닿지가 않았고 나의 영적 상태도 그리 좋진 않았기에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 맞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선 눈물을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것은 겸손함과 진실함이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약하게 보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에 눈물을 보이지 못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 암시를 걸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더강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서는 진실함이 묻어나올 수가 없다. 어쩌면 나도 이런 부류에 속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동안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성실함과 열심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눈물을 흘리는 적은 거의 없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랩 친구들과 칼텍과 우리 지도 교수, 그리고 랩을 위해 기도할 때 눈물이 핑 돌고, 하나님의 감동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이 적셔지는 걸 경험하면서 나 스스로도 내가 많이 변하고 있구나를 느끼곤 한다. 결국 눈물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스스로 낮아짐을 경험하면서, 회개할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흘릴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진실함이 없이는 눈물도 있을 수 없다. 너무나도 가슴 벅찬 기쁨이 있거나 심령이 무너지는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진실함이 없이는 눈물도 흘릴 수 없거늘 타인에 대해서는 또한 어떻겠는가? 연기에 능숙한 연기자라 할 지라도 그 배역의 감정과 일치되지 못하면 실감나는 눈물의 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는 겸손함을 갖추었고 또한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기에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그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 극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니 눈물 없이는 살 수 없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눈물은 또한 우리가 진실로 회개할 때 흐르게 된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한 분이시기에 그 분의 강력한 임재가 있을 때 우리는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많은 간증이 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그렇기에 우리가 날마다 그 분 앞으로 나아가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또한 그런 죄 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저절로 눈물이 나지 않을까?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다. 날마다 자신을 내려놓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 전도의 길을 가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 앞에서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며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런 눈물이 있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고 그 복음의 길을 순종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눈물은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는 모습을 볼 때 눈물을 흘린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울지 못한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그를 다시 살리기 전 눈물을 흘리셨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슬퍼하는 마리아와 다른 유대인들의 눈물을 보며 그들의 그 슬픔을 보며, 그들의 아픔을 느끼며 함께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것은 나사로를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었다. 이렇듯 눈물은 또한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3-35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보며 예수님은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실까? 그 눈물을 알기에, 그 사랑을 느끼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후,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달려가는 것일 것이다. 바울도 그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기에 아마도 많은 사랑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눈물은 감동의 표현이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충분히 감성적이기만 하다면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서 또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는 바로 구원이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 또한 그 사랑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전 통일부 장관인 김하중 장로님의 삶을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순간마다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눈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던 때이기에 그런 내 모습에 나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목도 하는 것은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 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기에 충분한, 크나 큰 감동이다.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수도 없이 몸으로 체험한 바울은 그 큰 감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겠는가? 그렇기에 그의 삶은 눈물의 삶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 자신의 생각이기에 사실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생각들을 통해 나의 신앙 생활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낙심과 좌절이 왜 찾아오는가? 왜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되는가? 주님께서 늘 내 곁에 계시고 그 분이 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에 그 믿음이 있다면 더이상 낙심도 무기력도 있을 수 없다. 낙심과 좌절과 무기력은 바로 그 순간 내가 내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나만의 세계에 단절되어 살고 있다는 적신호와 같다. 많은 내적치유 세미나나 설교에 등장하는 치유 경험은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그 순간 옆에서 함께 울고 계셨던 예수님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 예수님이 그 내면 깊은 곳의 상처를 만지시면,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에 주님은 어디에 계셨나고 울부짖으며 원망한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만 눈을 돌려 그 상황에서 함께 울고 계신, 아니 자신보다 더 슬프게 울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랑과 감동에 압도되어 결코 치유될 것 같지 않던 그 상처들이 치유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보고 듣는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옆에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악한 영들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주님을 놓치게 한다. 며칠 전의 나도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과 힘든 여건이 내 삶을 이끌어 갔던 시간...

힘들때면 눈물의 의미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나에게 눈물이 있는가?
나에게 주님을 향한 겸손함과 진실됨이 있는가?
내가 나의 죄성을 깨달으며 회개하고 있는가?
내가 주님의 그 사랑을 느끼며, 또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은 주님의 그 크신 역사하심을 경험함으로 인한 감동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나는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웃고, 울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그 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놓치고 있던 주님을 우리의 삶에 회복할 때 더이상 낙심도, 우울도, 낮은 자존감도, 걱정도 우리의 삶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도 자연스럽게 바울의 그 다음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하며 사는 내 모습을 기대해 본다. 주님 저의 시야를 넓혀 주시옵소서. 제게 능력주시는 주님의 자신감으로 살게하여 주옵소서!!

2011년 9월 16일 금요일

물레방아의 영성

기도를 하다보면 가끔씩 하나님께서 단어 하나씩을 툭 던지시며 깨달음을 주실 때가 있다. 며칠 전 승혁이도 재우고, 우리 부부도 기도도 할 겸 온 가족이 다 함께 운전하고 동네를 돌며 기도를 했었다. 한참을 그렇게 돌며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 주신 생각이 '물레방아' 였다. 난데없이 떠오른 물레방아라는 단어에 의아해 하며 물어나가는 나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물레방아는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라고.

물레방아는 혼자서는 돌지 못한다. 힘차게 쏟아지는 물이 있어야 돌 수 있는 것이기에 결국은 끊임없는 물의 공급을 필요로 한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공급이 있어야 나의 영적인 삶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물레방아란 말인가? 무언가 공급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는 예는 수도없이 많지 않은가?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도 가지 못하고, 전기가 없으면 냉장고도 제 일을 할 수 없고, 하물며 우리도 밥을 먹지 못하면 기운이 없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데 왜 물레방아를 말씀 하신 걸까?
사실 요즈음은 물레방아가 그저 물이 흐르면 도는 장식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원래 용도는 곡식을 찧는 방아였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무엇을 찧고 있는 건가? 나의 자아와 오래된 구습들, 나의 기준, 선입견들을 빻아서 고운 가루고 만들고 있다는 음성을 듣고 나서야 무언가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언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면서 열심히 내 자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지난 30년 조금 남짓 나의 삶을 이끌어 왔던 나의 가치관의 주된 요소들을 파쇄하고 고운 가루로 만들어 가는 작업...그렇게 곱게 가루가 된 나의 구습들은 떡으로 쪄지면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게 될 것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이제는 내 삶의 옛 틀을 다 깨고 부수어서 주님께서 원하는 새로운 떡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한 기쁜 일인가? 주님은 그 떡을 먹으라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3-58
이 물레방아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계속 돌려야 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나의 자아는 계속 해서 고개를 들려 할 것이고, 세상의 기준들은 계속해서 내 삶 속에 찌꺼기처럼 끼어 들어갈 것이기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영적인 공급을 받아 열심히 찧고 가루를 내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참된 양식으로 만들어서 먹음으로 내 안에 주님께서 거하시게 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일 터이니 말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기도는 저축하듯 쌓아둘 수 있는 것이지만 믿음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어떤 권사님을 통해 내게 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을 구하는 작업이 아닐런지...

또한 주님은 그 떡을 떼어 나누라 하신다. 나 혼자 열심히 내 자아를 죽이고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떡을 나눠주며 함께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그것이 크리스찬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해야할 일이 아닌가 싶다.

물레방아의 영성...
조금은 엉뚱하지만 깊은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오늘도 감사를 올려드린다.
할렐루야~!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다윗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

시편을 묵상하다보면 다윗의 시를 통해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절실함이 묻어나는 시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기뻐하셨던 것이 전혀 이상하지가 않고, 나 또한 큰 도전을 받게 된다.

오늘 너무나도 유명한 시편 23편을 읽고 있었는데 문득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여지껏 하나님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내용만 보아왔지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부분은 쏙 빼놓고 인지하고 있었나보다.

영문 성경으로 2-3절을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2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3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결국 2절과 3절의 첫 부분이 한 문장인 것. 이 부분도 사실 참 마음에 와 닿았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상황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평강'이다. 넓게 펼쳐진 푸른 초장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그 옆에 있는 바위를 베게 삼아 누워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면 절로 '좋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인터넷도 없고, 핸드폰도 없으며, 제출해야 할 보고서도, 밀린 실험 걱정도 없이 그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누워있을 때의 마음은 얼마나 평안할런지...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 시키신다. 얼마 전에도 평강에 대해 생각했었지만 역시 평강은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주님 안에서 우리의 내면의 평강을 찾고 나서야 우리의 영이 회복되고 소생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하나님이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문득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다윗이 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 가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다. 예수님을 알고 영접한 후, 그 사랑을 경험하고 느낌으로써 생겨나는, 다른 영혼을 향한 긍휼함과 사랑이 복음을 위한 열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 아닐런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누리는, 세상적으로 높아지는 것, 또 그로인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인생의 동기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똑같은 과정이고 결과라 할 지라도 그 속에 숨어있는 동기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일은 하늘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될 것이다. 삶의 이유가 주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삶은 의로운 삶이 되어야 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고, 사랑이시니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를 포함한 너무나도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섞여 살아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내 짐을 어깨에 지고, 내가 문제들을 풀어가려 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부담감은 더 커지고, 조급함이 몰려와 결국 지쳐서 쓰려지면서 다시 하나님을 붙잡게 된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나님 사랑한다고, 나의 자아를 죽여달라고 고백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그 고백이 전혀 반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잘 되면 교만이 올라오고,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살게 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부분은 참 중요하다. 그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니 말이다. 사실 다른 다윗의 시들을 보더라도 이러한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제가 부르짖으오니 응답하여주시고, 저의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옵소서'라고 외치고 있지만 최종 결론은 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내가 승리해야 하는 이유도 내가 잘 살고, 내가 높아지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조롱거리가 될까봐이고, 열방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보이기 위함이라는 결론이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난다. 내 삶의 안위와 영광과 축복을 보장해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른 믿지 않는 이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부르짖는 삶. 그렇기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다윗의 삶이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이 아닐까 싶다.

주님!!!
저의 삶의 목적을 늘 올바르게 인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크리스찬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임을 늘 잊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저의 자아를 죽이고 예수님께 주인자리를 내어 드리는 성령 충만함을 더더욱 구합니다. 주님! 깨어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봄 비의 영성

강력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더 강한 기름 부으심과 더 강한 능력의 나타남에만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난 일 년 조금 못되는 시간 동안의 경험은 나의 신앙 생활에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곳을 통해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점차 느끼게 되면서 집중하게 된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었다.

사랑이 있는가?
찬양에, 기도에, 설교에, 개인 사역에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면서 나를 돌아 보았을 때, 어느덧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강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더 강한 영권과, 더 강한 기적의 역사만을 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이 있는가?
내가 정말 찬양할때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을 통해 내 심령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높여드리고,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다시 올려드리고 있었는가?
내가 부르짖으며 기도할때 나는 과연 그 분의 사랑을 구하고 있었는가? 그저 악한 영들의 영향력을 대적할 수 있는 더 큰 권능과 눈에 보이는 은사만을 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설교 말씀을 통해 나는 무엇을 공급받으려 하고 있었던가? 우리의 삶의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되는 주님의 사랑을 말씀 속에서 발견하려고 했던가?
영안 사역을 하는 나의 마음 가짐은 무엇이었던가? 그 영혼을 사랑하고 그 내면의 상처를 주님의 사랑을 통해 치유하고픈 그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가? 주님의 사랑을 그 심령에 심어주고, 그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는 그 절실한 마음이 있었던가?

나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여전히 강력한 기름 부으심을 구하며 기도하던 나에게 어느날 주님이 주신 감동이 있었다.

"너는 강력한 기름 부음을 구하고 있지만, 봄 비와 같은 기름 부음이 더 좋은걸 아니? 난 봄 비와 같은 기름 부음이 좋단다."

봄 비??
어느덧 캘리포니아에서 살아온 시간이 7년째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잊어가고 있던 한국에서 맞던 그 봄 비를 잠깐 떠올려 보았다.
마치 안개와 같이 흩뿌리며 날리는, 그런 비.
우산을 써야할 지 말아야 할 지, 때로는 이게 비가 오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내리는 그런 흩날리는 비.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르겠기에 우산을 펴기 쑥쓰러워 그냥 걸어나가게 하는 그런 비.
하지만 그런 빗속을 걷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옷이 젖어있음을 문득 깨닫게 하는 비.

아마도 주님은 그런 기름 부으심을 말씀하신 것 같다.

너무나도 그 임재가 강력해서 온 몸이 떨리고 감격의 눈물이 나는 그런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는 것도 분명 우리의 신앙 생활에 유익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강력한 역사하심을 통해 회개하고 신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그 경험이 너무나도 강력한 나머지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한 것이라는 것을 잊는다면, 그래서 매번 그런 강렬한 현상만을 쫓게 된다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크게 느끼진 못할지라도, 내 옆에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구하며 친구와 대화하듯 그렇게 대화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분명 어느 순간 나의 영적인 옷이 흠뻑 젖어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령 충만의 열매들이 우리 삶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이런 봄비와 같은 성령 충만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경험할 때가 아닐까?

무소부재하신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찾기만 하면 항상 우리에게 찾아오실 수 있다. 우리가 할 것은 단지 믿음으로, 항상 주님을 부르며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런 삶이 우리의 일상이 될 때 우리는 너무 무겁지도 또 가볍지도, 않은 하지만 충만하게 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쁨으로 따르게 될 것이다.

주님, 오늘도 봄 비와 같이 저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1-13

자아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죄인임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 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주님과의 참된 교제도, 기쁨도, 감사함도 누릴 수가 없다.

나의 능력은 모자라지만, 나는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나의 지혜와 사랑은 감당치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계시기에, 그 분이 내 옆에 계시기에, 그 분을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겸손의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어야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힘을 내야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2011년 9월 9일 금요일

평강이 있느냐?

최근 여러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이 연이어 터져나오는 가운데 계속해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 아직 뚜렷한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고 가야할 길이 활짝 열린 것도 아니기에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느껴지는 조용한 음성...

"평강이 있느냐?"

무언가 뚜렷한 길을 제시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왠 뚱단지 같은 평강?'하는 생각으로 무시하고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또다시 감동이 느껴졌다.

"평강이 있느냐?"

내 생각이 아닌, 너무나 또렷한 생각에 내가 오히려 반문을 했다.

"주님, 지금 이렇게 많은 상황들이 앞에 있고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답답한 마음이 있는데 어찌 평강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또 들려오는 음성...

"평강이 있느냐?"

"그러니까 어떻게 지금 평강이 있을 수 있겠냐구요?"

"그러면 언제 평강이 있느냐?"

"......음......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성령 충만할때 평강이 있겠지요."

이 대답 후 마지막으로 물으시는 또 한 마디.

"평강이 있느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우리는 늘 문제를 대면하고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결정을 내려야 할 수많은 선택의 문제들이 있고, 직장에서의 문제, 진로에 대한 문제, 가족과의 관계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신앙의 문제들 등등 인생은 풀어가야 할 문제들 투성이인 여정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주님은 물으신다.

"평강이 있느냐?"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처럼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내 안의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평강이 없을 이유가 없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 16:8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해 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쫓기는 마음이 들 일도 없다. 그저 그분을 믿고 바라보며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나의 의지, 내 열심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하고 평강을 놓친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마치 내가 무언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기때문에 직면하게 된 것이라는 근거없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문제들을 통해 사단이 날리는 '생각'이라는 화살의 공격을 받고, 끊임없이 잠식해 들어가는 생각의 실타래에 묶여 더 복잡한 문제 속으로 들어가 조급함과 불안함으로 발버둥 치게 된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눅 24:36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 20: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찾으셨을때 평강이 있기를 당부하신 것은 단순히 안부 인사 차원이었을까?

어쩌면 이 질문은 나의 영적 상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금석과 같은 질문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 평강이 있는가? 혹시 나는 세상이 주는 문제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나 혼자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우편에서 나를 도우시려 서 계시는 주님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나에게 평강이 있는가?"

2011년 9월 2일 금요일

리더는 주님께 가장 많이 공급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9월 2일 Heath group prayer meeting에서 sharing 한 내용...

어쩌면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리더가 될 것을 강요받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리더들로부터 새로운 비전을 기대하고, 카리스마를 기대하고, 올바른 선택을 기대하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크리스찬 리더는 어떨까? 구약의 리더들은 메신저들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며 때로는 회개를 요구하고, 때로는 특정한 장소로 이끌어가고, 또 때로는 예배드리는 방법을 제시하는...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가장 많이 공급받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교제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능력으로 구체적인 계획과 해결책과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소위 공급해주어야 하는 현대 시대의 세상적 리더들과는 확실히 구분된 모습이었다.

우리는 크리스찬 리더를 꿈꾸고 있는가? 혹은 리더로서 섬겨야 하는 자리에 있는가?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교제하며 그 분께 무조건적인 공급을 받는 것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이다.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물으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하고 인도해 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누가 리더인가?
구약 시대의 리더는 확실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선택해서 세우셨기 때문에 리더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리더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대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원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성소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믿음으로 부르짖고, 구하면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우리는 더이상 우리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기에, 우리는 모두 리더가 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직책을 가짐으로써 세워지는 리더가 아니라 이 세상의 참된 리더인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도록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가장 많이 공급받는 자가 되어야 하며 늘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날마다 우리의 육적인 것을 죽이며,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능력으로 이끌어 갈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집중하고 순종하며 예수님께서 리더로 세워 쓰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늘 우리에게 물어야 한다.
자신이 이 땅에서 리더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인지하고 있는가? 그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과 또한 인도해가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믿으며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주님께서 간섭하심을 기대하고, 믿으며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삶에서 지치지 않도록 늘 주님께 공급받아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9/2/2011
Young Shik: Leader is the one who should be provided the most

Leaders in non-christian world are accepted as ones who provide insights to the future, resources to solve problems, connections for the integrity of the group etc.
But christian leaders should be ones to get provided the most from God.

Christian leaders before Christ were messengers (Abraham, Moses, and Samuel etc.). They carried over God’s thought and plan to the rest of the people. Thus, they were the ones who interacted with God the most, got provided from God the most.

Then Moses summoned Joshua and said to him in the presence of all Israel, “Be strong and courageous, for you must go with this people into the land that the LORD swore to their forefathers to give them, and you must divide it among them as their inheritance.
The LORD himself goes before you and will be with you; he will never leave you nor forsake you. Do not be afraid; do not be discouraged.”
Deuteromony 31:7-8
How about the era of the New Testament?
Christian leaders are still messengers. However they are more than just messengers. Because it is Jesus, who is inside those leaders, that commands, shows the way to go, and enlightens people.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 2:20
The true leader in this world is Jesus. And thus, if we are christians, we are all supposed to be leaders not because of our ability, knowledge, and experience but because of His presence in us. We all should ask Jesus provide us more, shine light on the path that we should follow. We should check ourselves if we are not blocking His providing and guidance and should let him be the LORD of our life.

Do you think you are currently a leader or a potential leader?
Are you focusing on being filled with the love of Jesus, his wisdom, his passion, and his humbleness or are you focusing on building a concrete plan, finding solutions, and reading the current trends?
Are you conscious of the fact that you are the leader through Jesus and the responsibility as a leader?
Are you seeking His guidance all the time?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tell you great and unsearchable things you do not know.
Jeremiah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