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0일 화요일

눈물이 있는가?

나의 삶에 있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종종 찾아오는 낙심과 낮은 자존감의 공격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 삶에서 아무런 기쁨도 열정도 찾기 힘든 날들이 가끔씩 나를 주저앉히곤 한다. 대부분 경제적인 부담이 느껴질 때, 일에 있어서 너무나도 오랫동안 진전을 보지 못하고 실패가 계속 될 때, 가장으로서 우리 가족들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함을 느낄 때,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과 또한 휴식의 시간이 없음으로 인해 극한의 피로를 느낄 때 이런 무기력의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 것 같은데 일단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마음 상태에 들어서게 되면 헤어나오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나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들이 힘든 상태에서 바닥을 한 번 치고서야 겨우 조금씩 회복이 되곤 한다. 며칠 전에도 이런 상태가 찾아와서 힘들어 하고 있었는데 문득 바울의 고백이 떠올랐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바울은 어떻게 해서 모든 상황에서 만족하고 자족할 수 있었을까?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했을때 주신 감동이 바로 '그는 많이 울었다...'라는 것이었다.

울었다고? 나에게 있어 바울의 이미지는 강인함과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의지와 열정이 있었고 진리를 설득력있게 말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었기에 강하고 이성적인 이미지가 일종의 선입견으로 내게 들어와 있었나보다. 그렇기에 그가 많이 울었다는 말은 선뜻 와 닿지가 않았고 나의 영적 상태도 그리 좋진 않았기에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 맞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선 눈물을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것은 겸손함과 진실함이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약하게 보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에 눈물을 보이지 못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 암시를 걸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더강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서는 진실함이 묻어나올 수가 없다. 어쩌면 나도 이런 부류에 속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동안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성실함과 열심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눈물을 흘리는 적은 거의 없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랩 친구들과 칼텍과 우리 지도 교수, 그리고 랩을 위해 기도할 때 눈물이 핑 돌고, 하나님의 감동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이 적셔지는 걸 경험하면서 나 스스로도 내가 많이 변하고 있구나를 느끼곤 한다. 결국 눈물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스스로 낮아짐을 경험하면서, 회개할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흘릴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진실함이 없이는 눈물도 있을 수 없다. 너무나도 가슴 벅찬 기쁨이 있거나 심령이 무너지는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진실함이 없이는 눈물도 흘릴 수 없거늘 타인에 대해서는 또한 어떻겠는가? 연기에 능숙한 연기자라 할 지라도 그 배역의 감정과 일치되지 못하면 실감나는 눈물의 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는 겸손함을 갖추었고 또한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기에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그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 극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니 눈물 없이는 살 수 없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눈물은 또한 우리가 진실로 회개할 때 흐르게 된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한 분이시기에 그 분의 강력한 임재가 있을 때 우리는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많은 간증이 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그렇기에 우리가 날마다 그 분 앞으로 나아가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또한 그런 죄 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저절로 눈물이 나지 않을까?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다. 날마다 자신을 내려놓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 전도의 길을 가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 앞에서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며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런 눈물이 있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고 그 복음의 길을 순종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눈물은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는 모습을 볼 때 눈물을 흘린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울지 못한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그를 다시 살리기 전 눈물을 흘리셨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슬퍼하는 마리아와 다른 유대인들의 눈물을 보며 그들의 그 슬픔을 보며, 그들의 아픔을 느끼며 함께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것은 나사로를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었다. 이렇듯 눈물은 또한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3-35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보며 예수님은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실까? 그 눈물을 알기에, 그 사랑을 느끼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후,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달려가는 것일 것이다. 바울도 그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기에 아마도 많은 사랑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눈물은 감동의 표현이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충분히 감성적이기만 하다면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서 또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는 바로 구원이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 또한 그 사랑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전 통일부 장관인 김하중 장로님의 삶을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순간마다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눈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던 때이기에 그런 내 모습에 나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목도 하는 것은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 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기에 충분한, 크나 큰 감동이다.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수도 없이 몸으로 체험한 바울은 그 큰 감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겠는가? 그렇기에 그의 삶은 눈물의 삶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 자신의 생각이기에 사실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생각들을 통해 나의 신앙 생활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낙심과 좌절이 왜 찾아오는가? 왜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되는가? 주님께서 늘 내 곁에 계시고 그 분이 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에 그 믿음이 있다면 더이상 낙심도 무기력도 있을 수 없다. 낙심과 좌절과 무기력은 바로 그 순간 내가 내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나만의 세계에 단절되어 살고 있다는 적신호와 같다. 많은 내적치유 세미나나 설교에 등장하는 치유 경험은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그 순간 옆에서 함께 울고 계셨던 예수님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 예수님이 그 내면 깊은 곳의 상처를 만지시면,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에 주님은 어디에 계셨나고 울부짖으며 원망한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만 눈을 돌려 그 상황에서 함께 울고 계신, 아니 자신보다 더 슬프게 울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랑과 감동에 압도되어 결코 치유될 것 같지 않던 그 상처들이 치유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보고 듣는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옆에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악한 영들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주님을 놓치게 한다. 며칠 전의 나도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과 힘든 여건이 내 삶을 이끌어 갔던 시간...

힘들때면 눈물의 의미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나에게 눈물이 있는가?
나에게 주님을 향한 겸손함과 진실됨이 있는가?
내가 나의 죄성을 깨달으며 회개하고 있는가?
내가 주님의 그 사랑을 느끼며, 또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은 주님의 그 크신 역사하심을 경험함으로 인한 감동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나는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웃고, 울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그 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놓치고 있던 주님을 우리의 삶에 회복할 때 더이상 낙심도, 우울도, 낮은 자존감도, 걱정도 우리의 삶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도 자연스럽게 바울의 그 다음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하며 사는 내 모습을 기대해 본다. 주님 저의 시야를 넓혀 주시옵소서. 제게 능력주시는 주님의 자신감으로 살게하여 주옵소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