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8일 금요일

오직 믿음으로

저의 지성으로는 저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수많은 일들이 있는 요즈음입니다.
제가 왜 이 곳에서 이렇게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냥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을 왜이리 실패의 경험으로 채워나가야 하는지
저에게 왜 승리하는 크리스찬 보다는 실족하고 힘들어하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여 주시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에
앞서 나갈 수도 없고 샛길로 달음질쳐 도망갈 수도 없는, 그저 주님께서 한걸음 내 딛으시길 기다리는 동행하는 길이기에,
앞으로 어느 곳으로 인도하실지
언제 떠나라 하실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은 주님께서 저에게 이곳에 있으라 하셨고 잠잠히 기다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다립니다.
그렇기에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땅이 비에 젖어 질척거릴지라도
오랜 기근으로 쩍쩍 갈라져가는 메마른 땅이라 할 지라도
주님이 기다리라면 끝까지 기다리고
주님이 같이가자면 끝까지 동행하길 원합니다.

그 아무리 질척거리는 땅일지라도
그 아무리 메마른 땅일지라도 
주님이 씨 뿌리시면 
언젠가 과실을 맺을 것을 믿기에
오늘도 기다리고 순종합니다.

제 이성과 지성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제 논리로는 안 될 것 같지만
그렇기에 100% 믿음을 보여드릴 순 없지만
그저 그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걸어가길 원합니다.

주님 오늘도 손 붙잡아 주시옵소서.



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나를 사랑하기

요즈음 계속해서 받는 메세지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

어제 교회에는 guest speaker로 Kedrick Pinex이 왔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들로 기대하고 갔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때는 정말 'Amazing'을 연달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생일과 이름을 통해 예언을 하고 메세지를 전달하는 그의 은사는 참으로 놀랍고 또한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은사와 예언을 떠나서 그가 전한 메세지 자체가 나를 향한 개인적인 터치가 있었던 것이기에 더 좋은 시간이었다.

사실 요즘 나의 짜증 지수는 상당히 높아져있다.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고 그로 인해 가족들도 힘들어할만큼 분쟁과 분열의 요소가 되고 있는데도 콘트롤이 잘 되질 않는다. 어제 교회에서 은혜받고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해서 짜증과 못마땅함이 올라오는 걸 참을수가 없었다. 보통 내면에 쌓아두었던 상처나 억압하고 있던 감정이 나갈 때는 그 상처나 억압된 감정이 드러나면서 나갈 때가 많다는 걸 많이 듣고 보았기에 내 안의 짜증과 못마땅함이 나가려고 그러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며칠을 보냈는데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감정 속에서 무언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음을 느꼈다. 와이프와도 계속해서 마찰이 있는 가운데 와이프가 기도하면서 나의 완벽주의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모든 짜증과 혈기가 나의 완벽주의에서 오는 것이고 그 완벽주의는 또한 나의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오늘 하루를 보내며 생각해보니 정답인 것 같다. 나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님의 기대와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나에 대한 기대...그런 기대에 부흥하고 인정받기 위한 노력들. 결혼 후에는 와이프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그 욕심으로 나 자신을 혹사하고 끊임없이 무엇으로부턴가 쫓기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결국 나 자신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완벽주의 때문에 더 불행하고 힘든 시간을 스스로 초래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침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몇가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동안 참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를 위해서는 무엇하나 사지도 못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는 노력은 거의 없이 살았던 나의 모습은 결국 나로 하여금 지치게 하고 또한 자유롭지 못하게 한 것 같다. 맛있는 걸 먹어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와이프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어디를 놀러가도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와이프를 위한 것이었다.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을 가면서도 나는 결코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부담만 느꼈던 그런 시간이 된 것이다 (물론 와이프와 가족들은 그저 공급받기만을 바란 것이 아니라 함께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또한 즐기는 것을 기대했음은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는 노력하는데 왜 사람들은, 나의 가족들은, 나의 와이프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하는 서운함을 내 안에 쌓아가게 되고, 그런 서운함은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다. 그 서운함은 또한 결국 내가 하는 일은 다 안 된다는 생각과,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낮은 기대감과, 또한 스스로를 보잘것 없게 보는 낮은 자존감으로 나를 주저 앉히곤 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돌이켜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그 사랑의 대상을 '우리'라고 정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렇기에 예수님의 심장을 달라고 구하면서 그 심장은 내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의 시선을 돌리며 그들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깨닫는건 그 예수님의 심장은 나에게로 먼저 와서 나의 온 몸에 주님의 보혈을 펌프질함으로 나를 소생시키고,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 우선 순위이라는 것이다. 

Kedrick이 전한 Knowing the love of God이라는 메세지도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문을 여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주님은 사랑하라 하신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하신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임을 생각케 한다. 
과연 나는 이 사랑을 품고 있었던가?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늘 깨닫고 있었던가?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하찮게 여기고 무능력하게만 여기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 전에 내가 그 사랑을 느끼고 또한 그 사랑을 통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가?

Kedrick 역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걸 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그 말에 100% 동의한다. 주변에서 소위 우울증으로 고생한다며 힘들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얼굴 표정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너무나도 경직된 표정으로 살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쉽게 티가 난다. 무엇을해도 기뻐보이고 활기가 있어 보인다. 이제는 그런 사랑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기에...그리고 또한 그 사랑을 전해야 할, 사랑에 빠진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품고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기뻐서 활력이 있어야 할 그 사랑하는 모습이 의무감으로 변질되어 너무나도 쉽게 지치고 서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즈음 나에게 계속해서 가만히 엎드려 있으라는 감동을 주셨다. 나는 그저 내 교만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기 위해 나를 낮추라는 말씀인가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공급받고 그 공급받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라는 메세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시 131

어미 품에 있는 젖 뗀 아이...
그 아이에게는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짊어지고 가야 할 부담감도 없다.
그저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 품에 안겨 있으면 그것 자체로 만족이다.
젖을 뗀 아이가 안겨 있을 때는 살기위해 빨아야 하는 그 행위도 없다.
그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것이고, 그 순간이 그 아이에게는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상황이다. 크게 무언가 이루려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나를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런 큰 일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 실패가 찾아오더라도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 내가 나를 바라보며 사랑을 전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내적치유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이제는 가만히 엎드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사랑을 구하고 그 넘치는 사랑에 기뻐하며 그 사랑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꾸준히 가져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겠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잊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전할 수 있을테니.

2011년 10월 21일 금요일

소유와 직업에도 불세례를 받으십시오-장봉운 목사님

여러가지 일들로 참 쉽지 않은 요즘이다. 주님께 붙어있으려고 노력하면서 또한 그 분을 더 알아가려고 노력하면서 열심을 내긴 하는데 상황적으로는 더 힘들어지고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러던 중 장봉운 목사님의 소유와 직업에서의 불세례에 대한 글을 접하면서 많은 위로와 또한 도전을 받았다. 정말 목사님의 글처럼 나 자신도 나의 구원은 오직 영과 육의 문제라고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소유와 직업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정의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다 물세례와 불세례를 받아 거듭날 때에 우리가 완전히 새로워짐을 기억해야겠다.


오늘 아침 갑자기 기차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졌었다. 여러가지 일들로 분주하고, 힘들고 또한 영적으로 싸우느라 지쳐서였을까? 한적한 시골길을 경쾌한 진동음과 함께 달리는 그런 기차 여행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삶은 계란을 깨어먹는 재미도 빠질 수 없겠지...ㅋㅋㅋ 왜 기차 여행이 좋은 것이고 운치가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담한 기차역에서의 정차였다. 기차를 타고 가기만 하는 것은 지루하다. 처음에는 신나고 휴식이 되는 여행이겠지만 계속해서 달리기만 한다면 철커덩 거리는 진동음은 더이상 경쾌함이 아니라 소음이 될 것이고 엉덩이 밑으로 스프링이 그대로 느껴지는 의자가 주는 불편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갈 것이다. 그렇지만 기차 여행에는 정차라는 것이 있다. 가만히 멈춰 서 있을 때, 내리는 사람들과 새롭게 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시간이 되면 잠시 내려서 열차 우동도 사먹는 그런 시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차는 또한 우리가 자동차 운전을 하고 가다가 마음만 먹으면 갓길에 세워놓고 쉴 수 있는 그런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수동적인 이벤트이다. 기차가 서면 서는 것이고 출발하면 달리는 것이다. 목적지만 바라보며 빠른 시간에 도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정차는 치명적이다. 조급함이 더 올라올 것이고 급기야 짜증과 혈기가 올라올 수 있는 그런 시간일테니...하지만 정차라는 것이 기차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사람은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잠시 내려 자판대 앞에서 과자를 사달라며 엄마 손을 붙잡고 조르는 아이를 보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서 한동안 바쁜 일상에 밀려 잊고 있던 부모님을 회상할 수도 있고, 서류 가방을 들고 바쁘게 뛰어가는 젊은 남자를 본다면 일에 대한 열정으로 힘든 것도 잊고 달려가던 자신의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차앞에 놓여있는 아직은 달리지 않은 길과 그 길의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주변의 멋진 경관을 보며 새로운 설레임과 기대감 또한 회복할 수 있다. 


어쩌면 이 기차 여행이 우리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정차해서 멈춰서야 할 때도 있고, 위험한 산 위를 달릴 때는 속도를 늦춰야만 할 때도 있고,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기차는 정확히 선로위를 달릴 것이고, 우리가 티켓을 손에 쥐고 있는 한 우리의 목적지에 분명히 도달할 수 있다. 티켓에 써있는 목적지를 보면 '아..내가 이곳에 가고 있는거지.'라며 자신의 목적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도 있다. 단지 우리는 기차의 여정에 자신을 맡기고, 긴장을 풀고 앉아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고, 회복또한 경험할 수 있다. 


힘들때면 한 번씩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 나는 지금 기차를 타고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물과 불 속을 달리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원하는대로 빨리 지나갈 수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틀수도 없지만, 우리가 그대로 내어 맡기고 그 물과 불을 지나가다 보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티켓을 손에 쥐고 놓지 않기만 하면...어느 순간 기차의 뒷칸에 실어 놓았던 우리의 짐들은 다 타서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장만해 주신 새로운 짐들 (이전의 짐 가방보다 훨씬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로 채워져 있음을, 그리고 기차는 더이상 덜커덩 거리며 거북이 걸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듯 초고속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과 그 희망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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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직업에도 불세례를 받으십시오
장봉운 목사님


구약성경 『출애굽기』는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구원과정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매우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반면에 구약성경은 서술적이고 역사적입니다.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철학적인 주제들에 관한 의미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신약시대를 사는 영적 과정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에서 찾아내야 할 영적 의미에 관한 요령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구원에 관한 증거로 세례가 있습니다(벧전 3:21). 구약시대에는 할례가 이스라엘인이 된 증거이며, 그것이 구원 받은 백성의 증표이기도 했습니다. 할례의 논쟁은 초대 교회에서 뜨거운 쟁점이었던 것은 구원의 증표로 계속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할례는 구약의 증표이며, 신약의 증표는 세례라는 사실을 교회가 공인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식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례가 물 뿐만 아니라 불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세례는 동시 또는 간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의 세례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불세례는 성령 안에서 주의 백성이 되어 성령의 도구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치는 증거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거듭남의 증거로서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례 가운데 우리가 이제까지 소홀히 여긴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은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통과하는 일련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인인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의인이 되어 이 땅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이 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물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신약성경은 세례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 10:1~2). 그런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몸만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 소유 모두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가축은 물론 각종 살림살이들을 다 가지고 탈출했고 그것들 모두를 가지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전 소유는 구름 아래 놓여있었으며, 물을 통과했습니다. 이로써 세례란 우리 몸뿐만 아니라 소유 전부에 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축이란 그 당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히브리인인 이스라엘은 농경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목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축은 생계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갈 근거가 되는 집과 옷가지들도 모두 구름 아래 그리고 바다를 통과했습니다.

소유를 이집트에 두고 나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새로운 것을 장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닌 과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물을 통과했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세례가 전혀 색다른 조건과 배경에 들어간 후에 받는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과 화해하는 증거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 시기의 우리 몸은 여전히 죄인이며, 우리 소유 전체가 여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지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 몸과 소유 전체에 대한 세례는 우리 것 전부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몸만이 구원되었고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 전체에 대한 세례의 의식이 아직은 확립되지 못한 것입니다. 소유에 대한 세례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생계 수단인 가축의 세례는 오늘날 우리들이 생계 수단인 직업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부분이 세례를 받아 주님의 것으로 인정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재물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며, 그 소유 전체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례는 물과 불의 이원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물은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불은 태워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이 두 가지 세례 과정을 통해서 전혀 다른 신분이 되었듯이 우리 소유와 직업 역시 이 두 가지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침묵적이고 내면적이라면 불세례는 역동적이고 외면적입니다. 물세례는 보이지 않지만 불세례는 가시적인 증상을 동반합니다. 이 두 가지를 통과함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듯이 우리의 소유와 직업이 이 두 가지 과정을 통과할 때 진정으로 주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다수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물세례는 받았지만 불세례는 받지 못한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세례의 대표적인 증상이 방언이며, 뜨거운 불이 내리는 기름부음의 체험을 가지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며, 세계관의 변화 등이 일어납니다. 누가 보아도 불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그 변화가 가시적이며, 급변적입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외형적 증거를 동반하기 때문에 눈으로 그 사실을 대부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둔감한 사람은 불세례를 미약하게 경험할 때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불세례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소유와 직업에 대해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우리는 소명이라는 말로 대치해서 불러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물질에 대한 세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못한 것입니다. 소유와 직업이 물로 정결해지고 불로 태워져서 전혀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재산과 직업은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자에게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밭을 가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듯이(신 25:4, 딤전 5:18, 고전 9:9) 일군에게 그 삯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분깃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들꽃과 참새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증거하신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군으로서 일을 하게 될 때 더 많은 것들을 공급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소유와 직업이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과할 때 비로소 자신의 소유와 직업이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몸이 불로 세례를 받게 되면 능력을 덧입게 되어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되며, 직업이 세례를 받으면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재정지기로서의 직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가졌던 소유가 타버리며, 직업이 새로워집니다. 그 실질적 현상이 바로 사업이 갑자기 기울어 재산의 손실이 오며, 직업을 잃게 되어 실직자가 되는 쓰라린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이런 위험스럽고 고통스런 과정을 밟고 있다면 이것이 자신의 소유와 직업에 대한 물과 불의 세례라고 인식해야지 실패나 징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낙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과정을 통과하여 몸과 재물과 직업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주요한 일군인 재정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몸을 비롯해서 재산 전체에 대한 세례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함같이 우리들도 완전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마 5: 48). 아직도 직업과 소유에 대한 불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전 존재가 세례를 받을 수 있기를 사모하십시오. 몸만 세례를 받고 재물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이는 마치 자기 재산 전부를 이집트에 두고 몸만 빠져 나온 것과 같습니다.

재산에 대한 불세례를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에 관해서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사 33:14)라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시온의 죄인들과 경건치 못한 자들이란 아직 불로 세례를 받지 못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과 성령의 인도를 제대로 인식할 줄 모르는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 시험이나 불세례를 받게 될 때 이렇게 믿음 없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사야는 참으로 용기를 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었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 33:21~24)

우리는 돛대 줄이 풀렸는지, 돛대 밑이 튼튼한지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무작정 항해를 나선 어리석은 뱃사람처럼 그렇게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니지는 않았습니까? 영의 일이 어떤 것인지,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 영적 주체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임하고 작용하는지, 도무지 알지도 못하면서 육신이 끄는 대로 그렇게 주의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전부로 알았습니다. 주님은 “때가 되면”이라고 그 시기에 대해서 언급하시고 계십니다. 불 시험 또는 불세례를 통과하는 그 시기가 이르게 되면 우리가 비록 저는 자처럼 무능할지라도 재물을 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 보장되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 관해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은 너희를 '주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 라고 일컬을 것이다. 열방의 재물이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마음껏 쓸 것이고, 그들의 부귀영화가 바로 너의 것임을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사 61:6) 이 말씀이 우리 세대를 위해서 간직해두신 말씀일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될 때가 바로 세상의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며, 마음껏 쓸 수 있게 되는 시기일 것입니다. 이런 시대가 우리에게 당하게 하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깨우고 자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 강력한 재정지기들을 세우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역할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이런 재정지기는 소유와 직업이 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 자격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믿음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시온의 죄인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런 불을 통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불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두려워할 것입니다. 직업을 잃고 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아서 파산하게 되기도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불세례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이 더 이상 말로만 다루어지지 않고 실제로 그 역할을 성도들이 할 수 있는 환경이 교회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중 사역이 회복되고 여러분들이 각각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직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며, 주어진 그 역할을 제대로 적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교회 구조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여러분은 ‘주님의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응답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주님의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열방의 재물이 우리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재물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열방의 재물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을 때에 그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각 사람이 스스로 성령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임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회가 제도적으로 만들어놓고 누구나 적당히 그 자리를 메우는 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제사장이 되는 길을 막는 방해가 될 뿐입니다.

여러분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몽학선생과 같고 율법과 같은 제도는 이제 성숙해진 후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장애물과 같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부귀영화가 우리의 것임을 자랑하게 되는 시대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을 품고 영의 일을 사모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영성훈련은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것이 재물의 축복을 얻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2011년 10월 19일 수요일

지금 내 안의 성전에는 누가 중심에 있는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시 122:6-9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소제목이 붙어있는 말씀이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사람들의 말에 기쁨으로 나서는 다윗은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전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를 축복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예루살렘을 축복하고, 형제들과 친구들을 위해 평강을 구하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번영을 구하는 시를 묵상하면서 예루살렘은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이기에 그곳으로 가는 것이 기쁨이요, 그곳이 축복을 받길 원하고 또한 번영하길 원한다는 말씀이 참 도전이 되었다. 그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하고 있을때만이 이런 고백과 간구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리는 기도하며 축복을 구한다. 성공을 구하고, 번영을 구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전히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못하고 나의 의를 의지하며 나의 높아짐을 구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함으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오셨기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이기에, 이제는 우리 자신이 예루살렘이다. 우리의 몸이 바로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축복하고, 자신의 번영을 구하는데 있어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크리스찬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또한 고백하지만 우리를 위한 우리 자신의 기도는 여전히 세상적인 경우가 많다. 우리 안에 성전이 있기에, 그 거룩한 예수님을 품고 사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축복이 있어야 하고 또한 번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채,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축복과 번영이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기복신앙적인 간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싶다. 같은 축복과 번영을 구하는 것이지만 그 동기를 살펴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주님을 만나고 부터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내 입에서 나왔던 기도는 '주여,어느 때까지이니까' 였다. 성경을 보면, 특히 시편에 참 많이 등장하는 말이기에 힘들다는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내뱉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과연 무슨 기도를 한 것이었나 싶다. 내가 그 기도를 할 때 나의 중심은 나를 향하고 있었던 경우가 많다. 크리스찬이기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바탕은 있었겠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분명 나의 욕심과 바램이었지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들어가 있지를 않았다. 하지만 다윗은 어떠했는가? '주여, 어느 때까지이니까'라고 간구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자신의 힘듦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려움을 통해 '너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조롱하는 대적들로 인한 더 큰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골리앗에게 분개하며 물맷돌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전장에 나섰던 그 다윗의 마음이 그 고백에 묻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눈으로 상황을 보는 그런 다윗의 마음보다는 나의 기준과 의로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컸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존재기에, 지존하신 그 분이 자녀로 불러주셨기에 나의 자존감이 높아지고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기에 내 몸이 성전이되고, 그렇기에 나를 더욱 사랑해야 하는 것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라 생각된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고, 또한 번영을 구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살펴 과연 그 곳이 성전인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모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온데간데 없고 그 성전 안에 나 자신이 들어가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과 번영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사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다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내가 낮은 자존감과 낙담과 낙심의 공격에 더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축복하고, 나의 번영을 더욱 크게 구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내가 성전이 되었기에...내 안에 지존하신 그 분을 모시고 있기에...나 때문이 아니라 그 분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한 나 자신을 잘 살피는 것 또한 게을리 하지 말아야 겠다.

과연 지금 내 안의 성전에는 누가 중심에 있는가?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치유의 길

유전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씩 특이한 편두통으로 인해 고통받곤 한다. 유전적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우리 어머니도 비슷한 증상으로 고생하시기 때문인데 신경과 의사인 매형조차 그저 참 보기 드문 현상이라며 딱히 뚜렷한 치료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리 흔한 증상은 아닌 것 같다. 흔한 것이든 아니든, 문제는 일단 이게 시작되면 너무 힘이 든다는 것. 위치는 매번 조금씩 달라지지만 시작되면 마치 긴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이 반복된다. 콕 찌르고는 잠시 괜찮다가 또 콕 찌르는 통증...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찌르는 그 양상이 랜덤하고 지속적이어서 더 힘들게 되고 또한 짜증도 나고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했었던 그 증상이 다시 지난주 화요일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리 심하지 않던 증상이었고, 목요일에는 에릭 홀저펄 목사님 치유 집회에도 가보고 하면서 금요일에는 실제로 통증이 거의 없어서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약을 통해서 나았다기 보다는 그저 기도받고 또한 기도로 대적하고 선포하면서 나았다는 생각에 '아~ 하나님이 고쳐주셨구나. 나도 이렇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하는구나' 하면서 기뻐했었는데 토요일 저녁때부터 그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도 전보다 더 심하게. 밤에도 잠을 못이루고 새벽내내 머리를 부여잡고 기도하면서 계속 물었다.
'믿음으로 선포하며 기도했는데, 참된 치유자이신 하나님께서 치유하여 주실 것을 믿음으로 선포했고 또한 나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였는데 왜 또 아픈 건가요?'
생각해보면 약에만 의지하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면서 나을 것으로 믿고 행동하는 나 자신의 모습도 참 많이 달라진 것이고 또한 그렇게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심한 통증으로 시달림을 받던 그 시기에는 그저 '왜 낫지 않을까? 왜 또 시작되었을까?'라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때 까지도 약기운 때문인지 통증은 조금 덜해지긴 했지만 투통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침 Wesley and Stacey Campbell 부부가 HRock Church에서 주일 예배 설교를 한다는 소식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통증에 시달리고는 있었지만...^^) 교회로 향했다. 늘 HRock Church의 찬양시간에는 기름부으심이 많이 임하는 걸 느끼지만 이번 찬양 시간에 찬양을 하는동안에는 특히 더 많은 기름부으심을 느낄 수 있었다. 크게 찬양하면서 어느덧 나도 모르게 통증을 잊을 수 있었고 더구나 찬양 후 Che & Sue Ahn 목사님 부부의 치유 기도도 있어서였는지 찬양 시간 이후 부터는 통증이 거의 없어졌다. 할렐루야~!!!

아픈 것이 나은 것은 좋은데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하나님의 치유란 어떤 것인지... 나 나름대로는 믿고 선포하며 치유함을 받으려고 구했는데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거기서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인지...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은 치유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언가를 해서 치유를 받으려는 노력을 했다. 안수를 받고, 기도로 대적하며 내어쫓는 등의 어떠한 행위를 통한 노력. 하지만 그것은 형식이고 방식이다. 우리가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 입국 심사를 받을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입국 검사관에게 우리의 여권을 보여주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여권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그 여권을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중요한 것인가? 두 손으로 여권을 들고 보여주던지, 웃으면서 보여주던지, 아니면 비장한 각오를 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보여주던지, 결국 우리는 모든 서류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다면 입국할 수 있게 되어있다. 보여주는 태도에 따라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공항 한 구석으로 끌려가 추가 질문을 받고, 더 자세한 검사를 받을수는 있지만 결국은 입국은 보장된 것이다. 즉, 입국을 위해서 여권을 보여주는 행위는 꼭 있어야 하지만 우선은 그 여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여권이란, 그 통행증을 발급받는 것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이해하고, 느끼고, 그것을 통해 그 크신 사랑을 더욱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편두통이 왜 나았다고 생각하느냐?'
주일 예배에서 강한 기름부으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가운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동안 나았다고 대답하는 나에게 다시 물으신다.
'그러면 왜 찬양하였느냐?'
'God is good!! 이잖아요. 주님의 그 사랑과 권능과 존재 자체로 인해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양했죠.'
하나님은 다시 물으심으로 나에게 도전을 주신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위 아이돌이라 하는 스타들을 팬들이 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냐? 팬들도 가수를 사랑하고 열정으로 섬기느니라.'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은 십대 청소년들이 이 시대의 아이돌이라고 하는 가수와 탤런트들에게 열광하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아이돌과 팬들 사이의 관계는 결국 겉모습 뿐인 관계이다. 자신의 팬이라는 이유로 어떤 스타가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보기 힘들다. 알맹이가 없는 겉모습. 자신의 팬들을 사랑한다고 하고, 나는 그 스타의 팬이기에 그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관계는 외적인 것에 근간을 둔, 껍데기만 있는, 결국 허무함만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누군가의 팬이 되어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고, 재능을 사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잘 누리기 위해서라도 문화를 누리고 여가 활동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보는 스타와 팬의 관계를 그대로 적용해서는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채찍 맞음의 더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없는 선포는 힘이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여권 발급하듯 그 통행증만 배부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가신 것이 아니다. 어떤 능력 행함의, 기적을 보이는 공식과 룰만을 보여주고 가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대적할 때 과연 우리는 그 참된 의미를 기억하며, 그 진정한 힘과 사랑을 느끼며 믿음으로 선포하며 기도하는가? 그저 성경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기에 그저 수학 공식에 숫자를 대입하듯 형식을 맞춰서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주의 보혈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영권/권능은 예수님의 그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결코 약할 수 없다. 무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그 십자가를 묵상하며,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더 깊이, 어제보다 오늘 더 깊이, 깨달아가고 누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십자가 보혈의 참된 의미가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고, 자신감의 보증 수표이고, 승리하는 삶으로 이끄는 통행증이 될 것이다.

2011년 10월 3일 월요일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니
마 6:33

크리스찬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면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와 많이 마주치게 되었다. 도대체 성경에서 그렇게 강조되고 있는 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시편 62편을 보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시 62:11-12

One thing God has spoken, two things have I heard: that you, O God, are strong, and that you, O Lord, are loving. Surely you will reward each person according to what he has done.
Psalms 62:11-12

처음보고 이해가 잘 안된다 싶어 영문 구절을 보았더니 한역본과 완전 다른 말이었다...ㅋㅋㅋ 영문 구절을 보면 결국 하나님은 한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나는 두 가지를 들었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강하시고, 주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처음 묵상할 때 내가 받은 것은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심과 동시에 사랑이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로 한면만 바라보고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가는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강한 능력의 하나님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고, 사랑을 공급받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만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으신다고 한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만 원하는가?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만 원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두가지 모습을 다 구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늘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balance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만 구해서도 안되고, 그분의 능력만 구해서도 온전히 그 분과 동행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묵상을 한 후 며칠 후 하나님은 이 구절의 또다른 의미를 변승우 목사님의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책을 읽는동안 깨닫게 하셨다. 'God is strong'이라는 것은 능력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것. 거룩하신 그 분은 그 속성상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렇기에 죄에 대해서는 회개함을 통하지 않고서는 늘 강하게 그 죄를 물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인 것이다. Strong한 하나님은 분명 이 죄에 대해 강력하게 대치되는 (strongly against sin) 모습을 그 능력과 함께 보이고 계신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의는 하나님의 분명한 속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그 분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삶이기도 했다. 그 분의 삶은 사랑의 삶이었고, 하늘의 의를 행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기다리던 메시아에게 감히 세례를 드릴 수 없다고 주저하던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더 잘 나타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5

결국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이땅에 드러내고 가르치기 위한 길을 걸어가셨던 것이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 땅에 전하며 살아야 하기에 우리의 삶은 의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통로가 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Righteousness goes before him and prepares the way for his steps
시 85:13
위의 시편 말씀처럼 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수 있다. 의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욱 강하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삶에, 가정에, 사역에, 직장에서 의를 드러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지만 그 죄사함은 거저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의 그 죄사함이 우리의 삶에 역사하실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친 것이고 베드로 역시 회개한 후 예수님께 세례를 받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라 한 것이다. 회개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정결케 하고 의가 우리의 삶에서 묻어나오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욱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예비하는 것이 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의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열쇠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확장시키는 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그들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을 먼저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무언가 세상적인 도덕적 기준에서 바르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면 '크리스찬이라는 사람이 뭐 저런가? 저런 모습이 크리스찬이라면 나는 별로 되고싶지 않다'라고 말하게 되곤 한다. 어쩌면 가장 큰 전도의 툴은 우리의 삶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면 당연히 우리는 세상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해도 선행을 베푸는 사람, 구제를 행하는 사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은 분명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또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렇듯 우리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그 하늘의 의가 세상에 드러날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업적이나 부나 명예를 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통해 세상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하고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말씀처럼 우리가 의를 통해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이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는 천국으로 가는 조건이자 세계를 심판하시는 기준이기도 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 20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 96:13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었는가? 행함이 없고 올바른 가르침이 없는 의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의를 구함과 동시에 행함으로 나타내야 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보실 우리의 세계를 의로 채우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고 또한 듣는다. 이 팔복에 의와 관련된 항목이 두 번 나온다는 것 또한 주목할만한 사실인 것 같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 6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 10

6절은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의의 필요성이다. 우리는 의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영적인 삶이 채워져야 한다. 또한 10절의 의는 세상으로 의를 드러내는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로 채움과 동시에 세상에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함을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는 또한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 6:14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고 영적 전쟁에 나서야 한다. 흉배란 무엇인가? 우리의 내면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던가? 의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보호하며 지켜야 한다. 말로, 상황으로, 낙담으로, 좌절로, 인간 관계 등등...끊임없이 우리를 어둠으로 몰아가려 하는 악한 영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 가슴에 품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먼저 구해야 한다. 신앙 생활은 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분을 알아가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묵상하고 또한 간구함으로 그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 위에서 여러번 언급한 것과 같이 의는 우리 자신의 삶을 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으로 드러내야 할 항목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함을 보여야 한다. 사실 행함이 없는 신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 아니던가? 야고보서 2장에서는 이 행함에 대해 강조되고 있다.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확신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인해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이렇게 키운 의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날마다 낙심과 좌절과 혼미함과 싸워야 하고, 저의 내면의 짜증과 혈기와 싸워야 하는 저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 자신의 죄인됨을 더 잘 아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제 안의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빛이 장악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의의 빛이 저를 통해 세상을 비춤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주시옵소서. 또한 그 의를 드러낼 수 있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도 주시옵소서. 의의 길에는 핍박이 있을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제가 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나의 틀 안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박사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서도 같은 실험실에서 비슷한 일을 하다보니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여기서 얼마나 있을 것인지, 이곳을 떠나면서 바로 지원을 해서 직장을 얻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또다시 포닥 생활을 할 것인지 등등...그럴때면 늘 대답하게 되는 것이 이곳에서 포닥을 단기간만 하고 좋은 결과가 나와서 나의 객관적인 스펙이 좋아지면 바로 지원해서 아카데미아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런 대답을 하면서 나의 생각속에 치고 들어오는 생각은 나의 박사과정 동안의 일은 소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포닥기간 동안 좋은 결과로 저명한 저널에 논문을 써야 어딘가에서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 나는 박사 과정 동안 좋은 논문을 못 썼기 때문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아니 거의 실패에 가깝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은 다분히 세상적이고, 이성에 기반을 둔, 나의 한계 속에서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지금은 아직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 노력해서 더 나은 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물론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자기를 개발하고, 또한 계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다음 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또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된다면 그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주님께 비전을 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세상적인 기준과 자신의 생각으로 지금의 내가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려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런 태도에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는 비전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당당히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전 선교동원가로 섬기고 계신 오석환 목사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도전이 되고, 기억에 남는 말씀 중의 하나가 "Father, if it is your will, then it is your bill!" 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그런 당당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크리스찬이라고 말하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라고,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우리가 정의내린 한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여전히 우리의 사고가 세상적인 틀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소개할때 어떤 식으로 소개하는가?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손기철 장로님을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나 자신도 손 장로님을 온누리 교회 장로님이시고, 교수님이지만 치유 사역을 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쓰니 마치 내가 손 장로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같이 보이는군.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른다...ㅋㅋ). 하지만 하나님이 손기철 장로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그 분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틀 속에서 바라보실까? 내 개인적인 짧은 소견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는 성령의 열매가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그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지...그는 온유하고 절제가 있는 사람이지...그는 기쁨이 넘치고 나눌줄 아는 사람이지...등등. 물론 더 많은 덕목들이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우리가 정의를 내리는 틀과 하나님께서 정의를 내리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렇기에 많은 경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사고와 이성의 틀 속에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서라고 하시면 서는 삶이 크리스찬의 삶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데 '아버지, 잠시만요.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그 길을 가려면 A도 준비해야 하고, B도 준비해야 하고, C도 적어도 이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 삶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얼마나 답답한 삶일까? '주님! 주님이 가라고 하시기에 갑니다! 제가 부족한 것은 주님이 아시니 채워주시고 예비해 주세요!'라는 삶이 진정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삶일 것이다.

나의 사고의 틀이, 정의를 내리는 기준이 바뀌길 바란다.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 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고 사는 삶. 나의 객관적인 사실로서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써 내가 드러나는 삶이 되길 원한다. 무슨 학교를 나오고 박사를 받았고 안 받았고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 온유한 사람, 하늘의 지혜를 전하는 사람, 나눌줄 아는 사람, 오로지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사람 등등...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정의가 되는 내가 되기를 구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