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니
마 6:33
크리스찬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면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와 많이 마주치게 되었다. 도대체 성경에서 그렇게 강조되고 있는 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시편 62편을 보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시 62:11-12
One thing God has spoken, two things have I heard: that you, O God, are strong, and that you, O Lord, are loving. Surely you will reward each person according to what he has done.
Psalms 62:11-12
처음보고 이해가 잘 안된다 싶어 영문 구절을 보았더니 한역본과 완전 다른 말이었다...ㅋㅋㅋ 영문 구절을 보면 결국 하나님은 한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나는 두 가지를 들었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강하시고, 주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처음 묵상할 때 내가 받은 것은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심과 동시에 사랑이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로 한면만 바라보고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가는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강한 능력의 하나님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고, 사랑을 공급받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만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으신다고 한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만 원하는가?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만 원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두가지 모습을 다 구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늘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balance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만 구해서도 안되고, 그분의 능력만 구해서도 온전히 그 분과 동행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묵상을 한 후 며칠 후 하나님은 이 구절의 또다른 의미를 변승우 목사님의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책을 읽는동안 깨닫게 하셨다. 'God is strong'이라는 것은 능력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것. 거룩하신 그 분은 그 속성상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렇기에 죄에 대해서는 회개함을 통하지 않고서는 늘 강하게 그 죄를 물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인 것이다. Strong한 하나님은 분명 이 죄에 대해 강력하게 대치되는 (strongly against sin) 모습을 그 능력과 함께 보이고 계신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의는 하나님의 분명한 속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그 분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삶이기도 했다. 그 분의 삶은 사랑의 삶이었고, 하늘의 의를 행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기다리던 메시아에게 감히 세례를 드릴 수 없다고 주저하던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더 잘 나타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5
결국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이땅에 드러내고 가르치기 위한 길을 걸어가셨던 것이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 땅에 전하며 살아야 하기에 우리의 삶은 의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통로가 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Righteousness goes before him and prepares the way for his steps
시 85:13
위의 시편 말씀처럼 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수 있다. 의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욱 강하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삶에, 가정에, 사역에, 직장에서 의를 드러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지만 그 죄사함은 거저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의 그 죄사함이 우리의 삶에 역사하실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친 것이고 베드로 역시 회개한 후 예수님께 세례를 받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라 한 것이다. 회개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정결케 하고 의가 우리의 삶에서 묻어나오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욱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예비하는 것이 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의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열쇠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확장시키는 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그들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을 먼저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무언가 세상적인 도덕적 기준에서 바르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면 '크리스찬이라는 사람이 뭐 저런가? 저런 모습이 크리스찬이라면 나는 별로 되고싶지 않다'라고 말하게 되곤 한다. 어쩌면 가장 큰 전도의 툴은 우리의 삶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면 당연히 우리는 세상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해도 선행을 베푸는 사람, 구제를 행하는 사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은 분명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또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렇듯 우리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그 하늘의 의가 세상에 드러날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업적이나 부나 명예를 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통해 세상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하고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말씀처럼 우리가 의를 통해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이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는 천국으로 가는 조건이자 세계를 심판하시는 기준이기도 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 20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 96:13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었는가? 행함이 없고 올바른 가르침이 없는 의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의를 구함과 동시에 행함으로 나타내야 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보실 우리의 세계를 의로 채우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고 또한 듣는다. 이 팔복에 의와 관련된 항목이 두 번 나온다는 것 또한 주목할만한 사실인 것 같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 6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 10
6절은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의의 필요성이다. 우리는 의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영적인 삶이 채워져야 한다. 또한 10절의 의는 세상으로 의를 드러내는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로 채움과 동시에 세상에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함을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는 또한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 6:14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고 영적 전쟁에 나서야 한다. 흉배란 무엇인가? 우리의 내면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던가? 의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보호하며 지켜야 한다. 말로, 상황으로, 낙담으로, 좌절로, 인간 관계 등등...끊임없이 우리를 어둠으로 몰아가려 하는 악한 영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 가슴에 품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먼저 구해야 한다. 신앙 생활은 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분을 알아가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묵상하고 또한 간구함으로 그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 위에서 여러번 언급한 것과 같이 의는 우리 자신의 삶을 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으로 드러내야 할 항목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함을 보여야 한다. 사실 행함이 없는 신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 아니던가? 야고보서 2장에서는 이 행함에 대해 강조되고 있다.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확신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인해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이렇게 키운 의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날마다 낙심과 좌절과 혼미함과 싸워야 하고, 저의 내면의 짜증과 혈기와 싸워야 하는 저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 자신의 죄인됨을 더 잘 아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제 안의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빛이 장악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의의 빛이 저를 통해 세상을 비춤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주시옵소서. 또한 그 의를 드러낼 수 있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도 주시옵소서. 의의 길에는 핍박이 있을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제가 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