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나를 사랑하기

요즈음 계속해서 받는 메세지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

어제 교회에는 guest speaker로 Kedrick Pinex이 왔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들로 기대하고 갔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때는 정말 'Amazing'을 연달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생일과 이름을 통해 예언을 하고 메세지를 전달하는 그의 은사는 참으로 놀랍고 또한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은사와 예언을 떠나서 그가 전한 메세지 자체가 나를 향한 개인적인 터치가 있었던 것이기에 더 좋은 시간이었다.

사실 요즘 나의 짜증 지수는 상당히 높아져있다.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고 그로 인해 가족들도 힘들어할만큼 분쟁과 분열의 요소가 되고 있는데도 콘트롤이 잘 되질 않는다. 어제 교회에서 은혜받고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해서 짜증과 못마땅함이 올라오는 걸 참을수가 없었다. 보통 내면에 쌓아두었던 상처나 억압하고 있던 감정이 나갈 때는 그 상처나 억압된 감정이 드러나면서 나갈 때가 많다는 걸 많이 듣고 보았기에 내 안의 짜증과 못마땅함이 나가려고 그러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며칠을 보냈는데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감정 속에서 무언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음을 느꼈다. 와이프와도 계속해서 마찰이 있는 가운데 와이프가 기도하면서 나의 완벽주의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모든 짜증과 혈기가 나의 완벽주의에서 오는 것이고 그 완벽주의는 또한 나의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오늘 하루를 보내며 생각해보니 정답인 것 같다. 나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님의 기대와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나에 대한 기대...그런 기대에 부흥하고 인정받기 위한 노력들. 결혼 후에는 와이프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그 욕심으로 나 자신을 혹사하고 끊임없이 무엇으로부턴가 쫓기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결국 나 자신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완벽주의 때문에 더 불행하고 힘든 시간을 스스로 초래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침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몇가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동안 참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를 위해서는 무엇하나 사지도 못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는 노력은 거의 없이 살았던 나의 모습은 결국 나로 하여금 지치게 하고 또한 자유롭지 못하게 한 것 같다. 맛있는 걸 먹어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와이프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어디를 놀러가도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와이프를 위한 것이었다.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을 가면서도 나는 결코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부담만 느꼈던 그런 시간이 된 것이다 (물론 와이프와 가족들은 그저 공급받기만을 바란 것이 아니라 함께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또한 즐기는 것을 기대했음은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는 노력하는데 왜 사람들은, 나의 가족들은, 나의 와이프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하는 서운함을 내 안에 쌓아가게 되고, 그런 서운함은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다. 그 서운함은 또한 결국 내가 하는 일은 다 안 된다는 생각과,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낮은 기대감과, 또한 스스로를 보잘것 없게 보는 낮은 자존감으로 나를 주저 앉히곤 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돌이켜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그 사랑의 대상을 '우리'라고 정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렇기에 예수님의 심장을 달라고 구하면서 그 심장은 내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의 시선을 돌리며 그들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깨닫는건 그 예수님의 심장은 나에게로 먼저 와서 나의 온 몸에 주님의 보혈을 펌프질함으로 나를 소생시키고,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 우선 순위이라는 것이다. 

Kedrick이 전한 Knowing the love of God이라는 메세지도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문을 여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주님은 사랑하라 하신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하신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임을 생각케 한다. 
과연 나는 이 사랑을 품고 있었던가?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늘 깨닫고 있었던가?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하찮게 여기고 무능력하게만 여기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 전에 내가 그 사랑을 느끼고 또한 그 사랑을 통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가?

Kedrick 역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걸 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그 말에 100% 동의한다. 주변에서 소위 우울증으로 고생한다며 힘들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얼굴 표정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너무나도 경직된 표정으로 살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쉽게 티가 난다. 무엇을해도 기뻐보이고 활기가 있어 보인다. 이제는 그런 사랑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기에...그리고 또한 그 사랑을 전해야 할, 사랑에 빠진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품고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기뻐서 활력이 있어야 할 그 사랑하는 모습이 의무감으로 변질되어 너무나도 쉽게 지치고 서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즈음 나에게 계속해서 가만히 엎드려 있으라는 감동을 주셨다. 나는 그저 내 교만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기 위해 나를 낮추라는 말씀인가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공급받고 그 공급받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라는 메세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시 131

어미 품에 있는 젖 뗀 아이...
그 아이에게는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짊어지고 가야 할 부담감도 없다.
그저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 품에 안겨 있으면 그것 자체로 만족이다.
젖을 뗀 아이가 안겨 있을 때는 살기위해 빨아야 하는 그 행위도 없다.
그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것이고, 그 순간이 그 아이에게는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상황이다. 크게 무언가 이루려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나를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런 큰 일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 실패가 찾아오더라도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 내가 나를 바라보며 사랑을 전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내적치유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이제는 가만히 엎드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사랑을 구하고 그 넘치는 사랑에 기뻐하며 그 사랑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꾸준히 가져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겠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잊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전할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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