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치유의 길

유전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씩 특이한 편두통으로 인해 고통받곤 한다. 유전적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우리 어머니도 비슷한 증상으로 고생하시기 때문인데 신경과 의사인 매형조차 그저 참 보기 드문 현상이라며 딱히 뚜렷한 치료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리 흔한 증상은 아닌 것 같다. 흔한 것이든 아니든, 문제는 일단 이게 시작되면 너무 힘이 든다는 것. 위치는 매번 조금씩 달라지지만 시작되면 마치 긴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이 반복된다. 콕 찌르고는 잠시 괜찮다가 또 콕 찌르는 통증...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찌르는 그 양상이 랜덤하고 지속적이어서 더 힘들게 되고 또한 짜증도 나고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했었던 그 증상이 다시 지난주 화요일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리 심하지 않던 증상이었고, 목요일에는 에릭 홀저펄 목사님 치유 집회에도 가보고 하면서 금요일에는 실제로 통증이 거의 없어서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약을 통해서 나았다기 보다는 그저 기도받고 또한 기도로 대적하고 선포하면서 나았다는 생각에 '아~ 하나님이 고쳐주셨구나. 나도 이렇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하는구나' 하면서 기뻐했었는데 토요일 저녁때부터 그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도 전보다 더 심하게. 밤에도 잠을 못이루고 새벽내내 머리를 부여잡고 기도하면서 계속 물었다.
'믿음으로 선포하며 기도했는데, 참된 치유자이신 하나님께서 치유하여 주실 것을 믿음으로 선포했고 또한 나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였는데 왜 또 아픈 건가요?'
생각해보면 약에만 의지하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면서 나을 것으로 믿고 행동하는 나 자신의 모습도 참 많이 달라진 것이고 또한 그렇게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심한 통증으로 시달림을 받던 그 시기에는 그저 '왜 낫지 않을까? 왜 또 시작되었을까?'라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때 까지도 약기운 때문인지 통증은 조금 덜해지긴 했지만 투통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침 Wesley and Stacey Campbell 부부가 HRock Church에서 주일 예배 설교를 한다는 소식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통증에 시달리고는 있었지만...^^) 교회로 향했다. 늘 HRock Church의 찬양시간에는 기름부으심이 많이 임하는 걸 느끼지만 이번 찬양 시간에 찬양을 하는동안에는 특히 더 많은 기름부으심을 느낄 수 있었다. 크게 찬양하면서 어느덧 나도 모르게 통증을 잊을 수 있었고 더구나 찬양 후 Che & Sue Ahn 목사님 부부의 치유 기도도 있어서였는지 찬양 시간 이후 부터는 통증이 거의 없어졌다. 할렐루야~!!!

아픈 것이 나은 것은 좋은데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하나님의 치유란 어떤 것인지... 나 나름대로는 믿고 선포하며 치유함을 받으려고 구했는데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거기서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인지...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은 치유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언가를 해서 치유를 받으려는 노력을 했다. 안수를 받고, 기도로 대적하며 내어쫓는 등의 어떠한 행위를 통한 노력. 하지만 그것은 형식이고 방식이다. 우리가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 입국 심사를 받을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입국 검사관에게 우리의 여권을 보여주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여권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그 여권을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중요한 것인가? 두 손으로 여권을 들고 보여주던지, 웃으면서 보여주던지, 아니면 비장한 각오를 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보여주던지, 결국 우리는 모든 서류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다면 입국할 수 있게 되어있다. 보여주는 태도에 따라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공항 한 구석으로 끌려가 추가 질문을 받고, 더 자세한 검사를 받을수는 있지만 결국은 입국은 보장된 것이다. 즉, 입국을 위해서 여권을 보여주는 행위는 꼭 있어야 하지만 우선은 그 여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여권이란, 그 통행증을 발급받는 것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이해하고, 느끼고, 그것을 통해 그 크신 사랑을 더욱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편두통이 왜 나았다고 생각하느냐?'
주일 예배에서 강한 기름부으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가운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동안 나았다고 대답하는 나에게 다시 물으신다.
'그러면 왜 찬양하였느냐?'
'God is good!! 이잖아요. 주님의 그 사랑과 권능과 존재 자체로 인해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양했죠.'
하나님은 다시 물으심으로 나에게 도전을 주신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위 아이돌이라 하는 스타들을 팬들이 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냐? 팬들도 가수를 사랑하고 열정으로 섬기느니라.'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은 십대 청소년들이 이 시대의 아이돌이라고 하는 가수와 탤런트들에게 열광하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아이돌과 팬들 사이의 관계는 결국 겉모습 뿐인 관계이다. 자신의 팬이라는 이유로 어떤 스타가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보기 힘들다. 알맹이가 없는 겉모습. 자신의 팬들을 사랑한다고 하고, 나는 그 스타의 팬이기에 그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관계는 외적인 것에 근간을 둔, 껍데기만 있는, 결국 허무함만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누군가의 팬이 되어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고, 재능을 사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잘 누리기 위해서라도 문화를 누리고 여가 활동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보는 스타와 팬의 관계를 그대로 적용해서는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채찍 맞음의 더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없는 선포는 힘이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여권 발급하듯 그 통행증만 배부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가신 것이 아니다. 어떤 능력 행함의, 기적을 보이는 공식과 룰만을 보여주고 가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대적할 때 과연 우리는 그 참된 의미를 기억하며, 그 진정한 힘과 사랑을 느끼며 믿음으로 선포하며 기도하는가? 그저 성경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기에 그저 수학 공식에 숫자를 대입하듯 형식을 맞춰서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주의 보혈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영권/권능은 예수님의 그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결코 약할 수 없다. 무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그 십자가를 묵상하며,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더 깊이, 어제보다 오늘 더 깊이, 깨달아가고 누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십자가 보혈의 참된 의미가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고, 자신감의 보증 수표이고, 승리하는 삶으로 이끄는 통행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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