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랩에서는 많은 친구들이 떠나면서 desk space가 남아돌게 되었다.
이때다 싶은지 많은 친구들이 여기저기로 옮기기 시작하는데 나도 뒤늦게 동참을 하게 되었다.
손 대기도 싫을만큼 지저분해 진 책상을 정리하기도 싫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 있어서도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시점인 듯 해서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오피스로 옮겼는데 훨씬 작은 방이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쾌적하다!!
깨끗해진 책상을 보니 정신도 깨끗해 지는 듯.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연구에 정진해봐야겠다.
화이팅!!
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1:1-8
가깝게 교제하는 집사님 가정과 함께한 Thanksgiving이 끝나갈 무렵, 일과 진로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나를 위해 다같이 기도를 해주는 감사한 시간이 있었다. 여러가지 돌아보고 생각해 볼 많은 내용들이 다같이 기도를 하는 중에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야고보서 1장 3절 말씀을 묵상하길 원하신다는 내용이었다.
야고보서...
여전히 얄팍한 성경 지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야고보서는 그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만 인식되어 있었다. 사실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라는 것도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니 나의 성경지식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새삼 깨달으며 부끄러움이 먼저 올라왔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초반부를 읽으면서 내 심령의 중심을 찌르는 그 말씀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지금의 나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끊임없는 인내의 과정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시련이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나의 박사 과정과 지금 보내고 있는 포닥 과정은 내 인생에 있어 정말 큰 시련의 시기였고 또한 시기이다. 나는 고난과 시련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부러운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당사자는 시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도 막상 그 자신은 풍성한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유학 생활은 고난의 시기이자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간은 나의 신앙 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나 자신은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나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풀어가려는 삶을 살고 있던 나에게 던져진 신앙이라는 문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과제였다. 그저 잘 되기 위해서, 위로받기 위해서, 의지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 종교라는 생각으로 살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의 가장 큰 신앙적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인가?' 였다.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내가 진심으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게 인도해 달라는 것이 변치않는 나의 고정 기도 제목이었다. 그런 기도를 하면서, 내 노력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려는 시도를 하면서, 일에 있어서, 가정 생활에 있어서 나의 고난과 시련은 시작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모두가 다 나의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똑같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되풀이 되었지만 그 되풀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의지하는 나의 자세가 다듬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내 안의 불신앙의 찌꺼기들이 걸러져 나가고 있는 과정이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과정. 매번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두 손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렇기에 야고보서 1장 3절의 말씀은 내 심령 깊숙히 꽂히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은 계속해서 No! 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내함으로 묵묵히 가는 것. 이 인내의 길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느정도 신앙이 자리잡아 가면서 No!라는 상황을 맞딱뜨리게 되었을 때 나의 반응은 흔들림이었다.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단계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의심이었다, 즉 나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었다. '과연 내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것인가?, 혹시 지금의 힘든 상황이 잘못된 나의 선택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예전에 들은 주님의 음성이 맞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또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닐까?' 이런 의심들이 들어옴으로 인해 나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결국 객관적인 상황으로 인해 힘든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믿음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으로 힘들게 되는 것이 그동안 내가 힘들어 했던 고정 패턴이었다. 하지만 6-8절에서는 의심하지 말라는 내용이 확실히 나온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
매번 흔들리고 힘들어 할 때마다 보게 되는 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더 인내하고 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듣게 되면서 지금까지 온 것이고, 지난 Thanksgiving 연휴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자꾸 뒤돌아 본다면 당연히 앞으로 나가는 속도는 더디게 되고 혼미함으로 갈 방향을 쉽게 잃게 된다. 천천히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방향이 틀어지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의심이 있는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지도 말라고 했다. 우리는 의심없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한 구해야 한다. 믿음의 시련이 만들어 내는 인내는 아마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의 의심의 찌꺼기들을 제거해 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주님 손 붙잡고 인도하시는대로 따른다고 하면서 언제까지나 계속 크고 작은 의심들과 씨름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직접 보이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함께 먹고, 마시고, 장난치며 자라온 형이 갑자기 메시아라고 하면서 나선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후,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만난 야고보는 그 누구보다 굳건한 믿음을 보였다고 한다. 교회의 기둥으로 불리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직접 보여준 야고보.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행동으로 직접 보여줌으로써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본이됨과 동시에, 낙타 무릎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주님께 순종함으로 기도하며 나아간 그 모습은 의심 없는 믿음 그 자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얼마나 아깝고 원통했겠는가? 자신과 함께 자라온 친형이기에, 메시아라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를 거부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하게 여겨졌었겠는가? 아마도 그렇기에 그의 믿음은 더욱 흔들릴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의지한 나머지 예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믿음을 뒤흔드는 일들을 우리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음을,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음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는 경험들이 수두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의심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믿음의 시련이 찾아온다. 하지만 성경은 인내하라고 한다. 그냥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김으로 인내하라고 한다.
나의 믿음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 같다. 야고보의 믿음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 자신이 주님의 뜻을 알았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확고해서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았기에 비록 모든 것이 불확실하더라도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뒤돌아 보지 않는 것.
의심하지 않는 것.
그 분의 선하신 이끄심을 믿는 것.
설사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
그리고 순종함으로 무릎꿇고 참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2011년 11월 26일 토요일
Thanksgiving!!
한국으로 따지면 추석이 되려나?
Thanksgiving 연휴이다. 미국의 가장 큰 휴일중 하나인 Thanksgiving에는 가족들이 다 모여서 큼지막한 turkey를 구워먹고 다양한 음식을 나누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자그마한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자녀들이 성장하여 다른 주로 떠나 제각기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가면 쉽게 만나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기에 미국의 명절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명절을 지내온 나같은 경우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터키를 썰어 먹는 것도 그다지 큰 감동이 되질 않고 호박 파이나 사과 파이 같은 것도 '와~ 맛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보면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연이어 나오고 다같이 모여 웃고 떠드는 한국의 명절 문화가 훨씬 더 다이나믹하고 활기찬 느낌인 것 같다. 내가 한국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려나??
아무튼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집사님 가정을 초대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에 와서 여러가지 힘든 일들을 겪으시고 여전히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온 가족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가정이다.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다가 학교를 구경하러 갔다. 우리 학교야 워낙 작은 학교이기에 다 돌아보는데 20분도 채 안걸리는데 왠일인지 다같이 다니며 여기저기서 사진찍고 놀다보니 거의 2시간이 걸렸다. 매일 다니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구경을 시켜주다보니 학교 곳곳에 단풍이 이쁘게 져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들을 보면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면서, 즐거워하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는 아이들과 집사님 부부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매일매일 지나가는 일상이 되어있는 공간이 저들에게는 그렇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 번듯하게 지어놓은 공원도 아닌 그저 학교 캠퍼스일 뿐인데 곳곳을 온 가족이 함께 다니며 즐거워하는 모습...그들에게는 어찌보면 별 것 아닌 그 나들이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온 가족이 다함께 시간을 내서 모이기도 힘든 그 가정...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본 단풍과 낙엽으로 해맑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감사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동안 얼마나 감사함을 잊고 살았는지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일년동안의 수확물을 놓고 기뻐하는 가운데 축제를 벌이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Thanksgiving day.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그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나 생각해본다. 크리스찬이라고 하면서도 그저 Thanksgiving이면 터키를 주문해서 먹는것만 생각하고, Thanksgiving day 다음날인 Black Friday만을 고대하며 이번에는 또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더 나은 deal을 얻고자 새벽부터 mall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열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돌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부터도 고개숙여 회개케 된다. 감사함 보다는 가진것이 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어했던 어제의 모습이 떠올라 더 죄송하다. 일이 생각만큼 진행되지 않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하루종일 방황했던 며칠전 일이 생각나 또 아버지께 죄송했다.
도대체 감사하는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추수 감사절 감사 헌금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하나님의 마당에 고스란이 뿌려놓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헛된 수고와 노력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내 삶 중의 감사하는 마음을 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항상 감사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은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진실되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거울이라 생각된다.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여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감사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바로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기에 행하지 못한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도대체 무엇을 듣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내가 기도할때도 자주 내뱉었던 말이기에 더 부끄러움을 느낀다.
기뻐하라고 하셨고, 기도하라 하셨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면-기쁨으로 충만해야하고, 감사가 넘쳐나야 하고, 늘 무릎꿇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려야 하는 날을 보내며,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매번 듣고 깨달아도, 잊고 잊고 또 잊는 나 자신에게도 한결같음으로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주님 말씀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Thanksgiving 연휴이다. 미국의 가장 큰 휴일중 하나인 Thanksgiving에는 가족들이 다 모여서 큼지막한 turkey를 구워먹고 다양한 음식을 나누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자그마한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자녀들이 성장하여 다른 주로 떠나 제각기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가면 쉽게 만나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기에 미국의 명절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명절을 지내온 나같은 경우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터키를 썰어 먹는 것도 그다지 큰 감동이 되질 않고 호박 파이나 사과 파이 같은 것도 '와~ 맛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보면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연이어 나오고 다같이 모여 웃고 떠드는 한국의 명절 문화가 훨씬 더 다이나믹하고 활기찬 느낌인 것 같다. 내가 한국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려나??
아무튼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집사님 가정을 초대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에 와서 여러가지 힘든 일들을 겪으시고 여전히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온 가족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가정이다.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다가 학교를 구경하러 갔다. 우리 학교야 워낙 작은 학교이기에 다 돌아보는데 20분도 채 안걸리는데 왠일인지 다같이 다니며 여기저기서 사진찍고 놀다보니 거의 2시간이 걸렸다. 매일 다니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구경을 시켜주다보니 학교 곳곳에 단풍이 이쁘게 져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들을 보면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면서, 즐거워하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는 아이들과 집사님 부부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매일매일 지나가는 일상이 되어있는 공간이 저들에게는 그렇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 번듯하게 지어놓은 공원도 아닌 그저 학교 캠퍼스일 뿐인데 곳곳을 온 가족이 함께 다니며 즐거워하는 모습...그들에게는 어찌보면 별 것 아닌 그 나들이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온 가족이 다함께 시간을 내서 모이기도 힘든 그 가정...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본 단풍과 낙엽으로 해맑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감사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동안 얼마나 감사함을 잊고 살았는지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일년동안의 수확물을 놓고 기뻐하는 가운데 축제를 벌이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Thanksgiving day.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그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나 생각해본다. 크리스찬이라고 하면서도 그저 Thanksgiving이면 터키를 주문해서 먹는것만 생각하고, Thanksgiving day 다음날인 Black Friday만을 고대하며 이번에는 또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더 나은 deal을 얻고자 새벽부터 mall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열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돌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부터도 고개숙여 회개케 된다. 감사함 보다는 가진것이 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어했던 어제의 모습이 떠올라 더 죄송하다. 일이 생각만큼 진행되지 않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하루종일 방황했던 며칠전 일이 생각나 또 아버지께 죄송했다.
도대체 감사하는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1-12
우리는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추수 감사절 감사 헌금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하나님의 마당에 고스란이 뿌려놓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헛된 수고와 노력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내 삶 중의 감사하는 마음을 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항상 감사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은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진실되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거울이라 생각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여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감사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바로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기에 행하지 못한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도대체 무엇을 듣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내가 기도할때도 자주 내뱉었던 말이기에 더 부끄러움을 느낀다.
기뻐하라고 하셨고, 기도하라 하셨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면-기쁨으로 충만해야하고, 감사가 넘쳐나야 하고, 늘 무릎꿇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려야 하는 날을 보내며,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매번 듣고 깨달아도, 잊고 잊고 또 잊는 나 자신에게도 한결같음으로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주님 말씀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치유의 길 II
그 분이, 아니 그 녀석이 다시 왔다...-.-;;
지난주부터 콕콕 다시 쑤시며 찾아온 편두통. 이번에는 오른쪽과 왼쪽을 함께 찌르는 통에 더 신경이 쓰이고 힘들었던 듯.
큰매형과 큰누나가 보내준 약도 잘 듣지를 않고...
지난번 예배드리며 찬양할 때 깨끗이 나았기에 (http://youngshikshin.blogspot.com/2011/10/blog-post_12.html) 이번에도 그렇게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어제 주일 예배도 참석했건만, 예배후에도 그다지 달라진 건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더 심해진듯한 느낌까지 있었기에 실망이 조금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강도가 더 심해져서 급기야는 와이프와 승혁이에게 짜증까지 내고 말았다. 이게 머리를 계속 찌르다보니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물론 나의 인격이 아직 그정도를 참아낼만큼이 안되는게 더 큰 이유겠지...빨리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달아서 이런 일도 웃으며 넘길 수 있어야 할 터인데...ㅋㅋ
계속 아프다 보니 급기야 이게 정말 바울이 얘기한 육체의 가시같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거 평생 이렇게 아픈걸 달고 살아야 하는거 아니야?'하는 걱정과 함께. 정말이지 두려움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귀신이 귀신같이 나의 가장 나약한 곳을 보고 두려움의 씨앗을 심어주고 있는걸 번번히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아무튼 점점 더 심해지는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서 아침에 학교로 향하기 전 차 안에서 잠시 기도를 했다. 기도라기보다는 그저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주님...아무리 대적하고, 결박하는 기도를 해도...주님의 능력을 믿고 제가 선포해도 계속 아프네요. 이게 정말 주님께서 말씀하신 '센 놈', '이런 유'인가 봐요 (막 9:29). 저는 이제 능력이 없으니 주님께서 직접 만져주세요.'
이렇게 고백하며 그냥 눈감고 앉아있는데, 15분쯤 지났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오늘은 약을 먹은 것도 아니기에 약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저 주님이 고쳐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나의 반응은 '할렐루야!!'라기 보다는 '이게 뭐지?'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큰 떨림이나 강력한 성령의 임하심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만 감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는데...굉장히 피곤하다는 생각만 잠시 했었는데...혹시 잠들었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눈을 떴을때 통증이 사라지다보니 왠지 조금 밋밋한 느낌이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통증이라는 나의 문제에 이끌려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갖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어쩌면 기도라는 도구로 나의 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결국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라는, 궁극적으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을 또 잠시 잊고 있었나보다. 실제로 많은 치유 사역자들이 기도를 통해 사람들을 치유하지만 결국 그 치유의 역사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일이다. 믿음으로 선포하고 기도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또한 중요한 치유의 과정, 아니 기도 응답의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잠잠히 기다리는 것.
우리는 얼마나 이 중요한 스텝을 놓치며 살고 있는 것인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쉽게 잊게 되는 것 같다.
같은 증상이었지만 여전히 다른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나의 생각과 의지에 기대어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얼마나 정확히 집어내시는지 매번 나의 생각과 정확히 반대 상황으로 역사하심으로 나의 생각을 깨시곤 한다. 그렇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밖에 없다...
Thanksgiving Day가 있는 한 주.
더 많은 감사할 일들로 채워질 것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지난주부터 콕콕 다시 쑤시며 찾아온 편두통. 이번에는 오른쪽과 왼쪽을 함께 찌르는 통에 더 신경이 쓰이고 힘들었던 듯.
큰매형과 큰누나가 보내준 약도 잘 듣지를 않고...
지난번 예배드리며 찬양할 때 깨끗이 나았기에 (http://youngshikshin.blogspot.com/2011/10/blog-post_12.html) 이번에도 그렇게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어제 주일 예배도 참석했건만, 예배후에도 그다지 달라진 건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더 심해진듯한 느낌까지 있었기에 실망이 조금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강도가 더 심해져서 급기야는 와이프와 승혁이에게 짜증까지 내고 말았다. 이게 머리를 계속 찌르다보니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물론 나의 인격이 아직 그정도를 참아낼만큼이 안되는게 더 큰 이유겠지...빨리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달아서 이런 일도 웃으며 넘길 수 있어야 할 터인데...ㅋㅋ
계속 아프다 보니 급기야 이게 정말 바울이 얘기한 육체의 가시같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거 평생 이렇게 아픈걸 달고 살아야 하는거 아니야?'하는 걱정과 함께. 정말이지 두려움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귀신이 귀신같이 나의 가장 나약한 곳을 보고 두려움의 씨앗을 심어주고 있는걸 번번히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아무튼 점점 더 심해지는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서 아침에 학교로 향하기 전 차 안에서 잠시 기도를 했다. 기도라기보다는 그저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주님...아무리 대적하고, 결박하는 기도를 해도...주님의 능력을 믿고 제가 선포해도 계속 아프네요. 이게 정말 주님께서 말씀하신 '센 놈', '이런 유'인가 봐요 (막 9:29). 저는 이제 능력이 없으니 주님께서 직접 만져주세요.'
이렇게 고백하며 그냥 눈감고 앉아있는데, 15분쯤 지났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오늘은 약을 먹은 것도 아니기에 약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저 주님이 고쳐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나의 반응은 '할렐루야!!'라기 보다는 '이게 뭐지?'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큰 떨림이나 강력한 성령의 임하심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만 감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는데...굉장히 피곤하다는 생각만 잠시 했었는데...혹시 잠들었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눈을 떴을때 통증이 사라지다보니 왠지 조금 밋밋한 느낌이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통증이라는 나의 문제에 이끌려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갖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어쩌면 기도라는 도구로 나의 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결국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라는, 궁극적으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을 또 잠시 잊고 있었나보다. 실제로 많은 치유 사역자들이 기도를 통해 사람들을 치유하지만 결국 그 치유의 역사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일이다. 믿음으로 선포하고 기도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또한 중요한 치유의 과정, 아니 기도 응답의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잠잠히 기다리는 것.
우리는 얼마나 이 중요한 스텝을 놓치며 살고 있는 것인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쉽게 잊게 되는 것 같다.
같은 증상이었지만 여전히 다른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나의 생각과 의지에 기대어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얼마나 정확히 집어내시는지 매번 나의 생각과 정확히 반대 상황으로 역사하심으로 나의 생각을 깨시곤 한다. 그렇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밖에 없다...
Thanksgiving Day가 있는 한 주.
더 많은 감사할 일들로 채워질 것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2011년 11월 15일 화요일
찬양과 경배는 크리스찬의 특권입니다
고난의 시기...
정말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런지 모르겠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11월 11일.
하나님께서 반전을 보여주실 날이라고 믿음으로 취했던 그 날.
매일 안되는 일 뿐이니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할 겸 그나마 예전에 잘 되었던 일을 다시 한 번 테스트 해 보기로 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시작한 일이건만 결국은 예전처럼 안되는 것을 확인했고 이제는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실패에도 무덤덤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와이프를 통해, 그리고 몇몇의 지인들을 통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아서였는지 그다지 실망감도 좌절도 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답답함은 여전히 있었지만...
하루 일을 마감하고 지하의 실험실에서 나와 어둑어둑한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게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는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이제는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절망의 상황일지라도 크리스찬이라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면 아버지를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높여드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성령님을 사랑한다는 그 고백은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집으로 향하는 길,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 찬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계속해서 올려드리는 가운데 평안이 찾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기쁨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내일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더이상 무언가 시도해볼만한 조건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잔잔한 기쁨이 찾아왔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
성령님의 능력을 믿는 것.
이 모든 일들은 믿음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특권.
그렇기에 감사하다.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을 관장하는 이성이라는 시스템은 마치 바이러스 백신의 실시간 감시 서비스와 같이 우리 삶의 문제들을 찾아내 적색 경고등을 켜게 한다. 무언가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 않을 때, 세상적인 기준으로 조심하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다가올 때, 우리의 이성은 많은 적색 경고등을 밝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문제에 집중케 한다. 하지만 그 경고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우리의 온 생각이 그 문제로 집중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접하게 된다. 우리의 온 신경이 그 문제에 사로 잡히게 될 때, 그 문제는 점점 더 커지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잊게되곤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도 우리의 온 생각은 그 문제에 사로잡혀버린 채 다른 모든 것은, 심지어 내 삶의 주인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주님까지도 잊게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특권까지도 까맣게 잊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주님뿐이라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주님이 아니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머릿속의 생각은 온통 그 문제 생각 뿐이다. 해결책을 찾아내느라 쉬지않고 계속해서 돌아가는 그 머릿속에서 더이상 찬양도, 경배도, 사랑 고백도 찾아볼 수 없게 될 때...바로 그 상황이 영적인 적색 경고등이 켜져있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눈물 펑펑 흘리며 인상깊게 보았던 김용의 선교사님의 '예수면 다다'라는 영상이 떠올랐다 (http://www.youtube.com/watch?v=MK6cSQjNQG4).
예수면 다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문제가 없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아니 인생 자체가 문제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예수면 다다!'라고 외치는 김용의 선교사님처럼 우리도 나의 이성이 경고하는 문제의 적색 경고등을 뒤로하고 우리의 특권을 누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고 찬양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영적인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것.
그 특권을 잊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할 것이다.
정말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런지 모르겠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11월 11일.
하나님께서 반전을 보여주실 날이라고 믿음으로 취했던 그 날.
매일 안되는 일 뿐이니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할 겸 그나마 예전에 잘 되었던 일을 다시 한 번 테스트 해 보기로 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시작한 일이건만 결국은 예전처럼 안되는 것을 확인했고 이제는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실패에도 무덤덤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와이프를 통해, 그리고 몇몇의 지인들을 통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아서였는지 그다지 실망감도 좌절도 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답답함은 여전히 있었지만...
하루 일을 마감하고 지하의 실험실에서 나와 어둑어둑한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게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는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이제는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절망의 상황일지라도 크리스찬이라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면 아버지를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높여드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성령님을 사랑한다는 그 고백은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집으로 향하는 길,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 찬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계속해서 올려드리는 가운데 평안이 찾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기쁨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내일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더이상 무언가 시도해볼만한 조건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잔잔한 기쁨이 찾아왔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
성령님의 능력을 믿는 것.
이 모든 일들은 믿음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특권.
그렇기에 감사하다.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을 관장하는 이성이라는 시스템은 마치 바이러스 백신의 실시간 감시 서비스와 같이 우리 삶의 문제들을 찾아내 적색 경고등을 켜게 한다. 무언가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 않을 때, 세상적인 기준으로 조심하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다가올 때, 우리의 이성은 많은 적색 경고등을 밝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문제에 집중케 한다. 하지만 그 경고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우리의 온 생각이 그 문제로 집중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접하게 된다. 우리의 온 신경이 그 문제에 사로 잡히게 될 때, 그 문제는 점점 더 커지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잊게되곤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도 우리의 온 생각은 그 문제에 사로잡혀버린 채 다른 모든 것은, 심지어 내 삶의 주인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주님까지도 잊게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특권까지도 까맣게 잊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주님뿐이라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주님이 아니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머릿속의 생각은 온통 그 문제 생각 뿐이다. 해결책을 찾아내느라 쉬지않고 계속해서 돌아가는 그 머릿속에서 더이상 찬양도, 경배도, 사랑 고백도 찾아볼 수 없게 될 때...바로 그 상황이 영적인 적색 경고등이 켜져있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눈물 펑펑 흘리며 인상깊게 보았던 김용의 선교사님의 '예수면 다다'라는 영상이 떠올랐다 (http://www.youtube.com/watch?v=MK6cSQjNQG4).
예수면 다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문제가 없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아니 인생 자체가 문제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예수면 다다!'라고 외치는 김용의 선교사님처럼 우리도 나의 이성이 경고하는 문제의 적색 경고등을 뒤로하고 우리의 특권을 누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고 찬양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영적인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것.
그 특권을 잊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할 것이다.
2011년 11월 7일 월요일
껌딱지의 영성
살다보면 이상하게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걸 경험하게 된다. 그것도 힘들어서 더이상 겪고싶지 않은 그런 일들이...
똑같은 상황이 잊을만하면 한번씩 찾아와서 힘들게 하는걸 보면 분명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고 싶어하시는 무언가가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생각해보는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떠오르는게 껌딱지였다. 그것도 쫄깃하고 찐득한 껌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과일향 폴폴 나는 그런 껌이 아니라 바닥이 착 붙어서 밟히고 밟혀 시커멓게 먼지로 덮혀버린 그런 껌딱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과연 반복되는 문제들과 껌딱지에 무슨 관계가 있을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보도블럭 한 복판에 붙어있는 껌은 그저 밟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히는...
아마도 처음에는 누군가의 발에 밟혀 그 신발 밑창에 붙어 딸려갈 뻔 하기도 했을 것이고 거뭇거뭇 묻어나는 먼지들 사이로 불그스름한 속살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밟는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히는 사이 껌은 더 넓게 퍼져 바닥에 더 강하게 붙게되고 더 많은 먼지가 묻어 사람들의 신발 밑창에 딸려 갈 확률은 점점 더 낮아지겠지.
어쩌면 이것이 반복되는 문제에 있어서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세상을 향해 소리없는 외침으로 부르짖으며 살고 있다.
나는 힘들다고.
나는 아프다고.
나는 외롭다고.
나 좀 이해해 달라고.
나는 잘 났다고.
나는 똑똑하다고.
나 좀 알아달라고.
나 좀 인정해 달라고.
말로 내뱉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것들을 구하며 세상으로 나아갈 때가 많다.
내 안의 자아가 살아서 펄펄 뛰어 놀아 그럴수도 있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내면에서 키워온 상처를 통한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세상을 향해 우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경우 우리에게 잠잠하라 하신다.
그저 붙어있으라 하신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혀 더이상 납작해질 수 없을 것만큼 납작해진 껌딱지 처럼...
겉은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으로 이제는 아무런 끈기도 남아있지 않지만 땅바닥에 붙어있는 아랫부분은 여전히 끈적한 불그스름한 속살을 간직하고 있고, 밟힌만큼 더 강하게 바닥에 붙어있게 되는 그런 껌딱지처럼...
개인적으로 우리가 겪게 되는 관계의 문제를 나는 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사람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나 상황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고난에 있어 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을 모두 다 내 구미에 맞게 바꿀수도 없고, 상황을 갑자기 나에게 호전적으로 바꾸는 것도 나의 힘으로는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바뀌는 것이다. 내 힘을 키워 그들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것을 꿈꾸기 보다는 그저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외부로부터 나의 내면으로 돌격해 오는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무덤덤해지는 것.
밟히고 밟혀서 더이상 사람들의 밟힘에 반응하지 않는 껌딱지처럼 우리는 예전에 그렇게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했던 문제들에 무덤덤해질 수 있다.
그저 바닥에 붙어있기만 하면...
물론 신발에 딸려나가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지. 내가 바뀌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임을 깨달으며 제발 나 좀 바꿔달라고 간구하면서...
그저 주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그 분을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 수록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세상을 향한 끈기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일이 있다면...
더구나 그 힘든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아마도 그 때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들, 그 상황들을 향해 나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문제들을 돌아보면서 그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간구하다보면
이전에는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문제들이 차츰 별 것 아닌 문제들이 되어나갈 것이고
어쩌면 껌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같은 고난이 어느 순간 더 기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와 하나님을 더 가깝게 만들어 줄 것이기에, 내가 하나님께 더 강하게 붙어있을 수 있게 해 줄 것이기에....
더구나 주님은 내가 세상을 향해 먼지만을 드러내고 주님을 향해 끈기를 보일때 우리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약속하신다.
지금 내가 껌딱지와 같이 여겨진다면 지금이 감사할 때일 것이다.
반복되는 문제는 나의 내면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일테니...
그리고 그저 주님께만 붙어있으면 그 모든 문제가 더이상 문제가 아닌 축복이 되고 우리가 맺어나갈 과실의 씨앗이 될 터이니...
오늘부터는 길바닥의 껌딱지를 보면 기분 좋게 웃으며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똑같은 상황이 잊을만하면 한번씩 찾아와서 힘들게 하는걸 보면 분명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고 싶어하시는 무언가가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생각해보는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떠오르는게 껌딱지였다. 그것도 쫄깃하고 찐득한 껌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과일향 폴폴 나는 그런 껌이 아니라 바닥이 착 붙어서 밟히고 밟혀 시커멓게 먼지로 덮혀버린 그런 껌딱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과연 반복되는 문제들과 껌딱지에 무슨 관계가 있을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보도블럭 한 복판에 붙어있는 껌은 그저 밟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히는...
아마도 처음에는 누군가의 발에 밟혀 그 신발 밑창에 붙어 딸려갈 뻔 하기도 했을 것이고 거뭇거뭇 묻어나는 먼지들 사이로 불그스름한 속살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밟는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히는 사이 껌은 더 넓게 퍼져 바닥에 더 강하게 붙게되고 더 많은 먼지가 묻어 사람들의 신발 밑창에 딸려 갈 확률은 점점 더 낮아지겠지.
어쩌면 이것이 반복되는 문제에 있어서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세상을 향해 소리없는 외침으로 부르짖으며 살고 있다.
나는 힘들다고.
나는 아프다고.
나는 외롭다고.
나 좀 이해해 달라고.
나는 잘 났다고.
나는 똑똑하다고.
나 좀 알아달라고.
나 좀 인정해 달라고.
말로 내뱉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것들을 구하며 세상으로 나아갈 때가 많다.
내 안의 자아가 살아서 펄펄 뛰어 놀아 그럴수도 있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내면에서 키워온 상처를 통한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세상을 향해 우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경우 우리에게 잠잠하라 하신다.
그저 붙어있으라 하신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혀 더이상 납작해질 수 없을 것만큼 납작해진 껌딱지 처럼...
겉은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으로 이제는 아무런 끈기도 남아있지 않지만 땅바닥에 붙어있는 아랫부분은 여전히 끈적한 불그스름한 속살을 간직하고 있고, 밟힌만큼 더 강하게 바닥에 붙어있게 되는 그런 껌딱지처럼...
개인적으로 우리가 겪게 되는 관계의 문제를 나는 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사람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나 상황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고난에 있어 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을 모두 다 내 구미에 맞게 바꿀수도 없고, 상황을 갑자기 나에게 호전적으로 바꾸는 것도 나의 힘으로는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바뀌는 것이다. 내 힘을 키워 그들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것을 꿈꾸기 보다는 그저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외부로부터 나의 내면으로 돌격해 오는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무덤덤해지는 것.
밟히고 밟혀서 더이상 사람들의 밟힘에 반응하지 않는 껌딱지처럼 우리는 예전에 그렇게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했던 문제들에 무덤덤해질 수 있다.
그저 바닥에 붙어있기만 하면...
물론 신발에 딸려나가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지. 내가 바뀌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임을 깨달으며 제발 나 좀 바꿔달라고 간구하면서...
그저 주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그 분을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 수록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세상을 향한 끈기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일이 있다면...
더구나 그 힘든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아마도 그 때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들, 그 상황들을 향해 나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문제들을 돌아보면서 그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간구하다보면
이전에는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문제들이 차츰 별 것 아닌 문제들이 되어나갈 것이고
어쩌면 껌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같은 고난이 어느 순간 더 기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와 하나님을 더 가깝게 만들어 줄 것이기에, 내가 하나님께 더 강하게 붙어있을 수 있게 해 줄 것이기에....
더구나 주님은 내가 세상을 향해 먼지만을 드러내고 주님을 향해 끈기를 보일때 우리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약속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 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7-8
지금 내가 껌딱지와 같이 여겨진다면 지금이 감사할 때일 것이다.
반복되는 문제는 나의 내면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일테니...
그리고 그저 주님께만 붙어있으면 그 모든 문제가 더이상 문제가 아닌 축복이 되고 우리가 맺어나갈 과실의 씨앗이 될 터이니...
오늘부터는 길바닥의 껌딱지를 보면 기분 좋게 웃으며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나는 아름답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아 1:5
2011년을 맞이하던 날, 전에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께서 다같이 기도를 하고 2011년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보자고 하셨다. 기도를 하고, 눈을 감고, 성경을 펼쳐 손으로 찍은 말씀을 믿음으로 받자는 것이었는데 내가 받은 말씀은 아가서 1장 5절 말씀이었다.
나름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뜨고 이 말씀을 확인했을때 솔직히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직 아가서를 제대로 묵상해 본 적도 없었던 데다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그런 말씀이었기에 그랬고, 더 나아가 한참 하나님을 깊게 만나기 시작했을 때이기에 무언가 근사해 보이는 말씀을 기대한데서 온 실망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와이프에게도 그저 '난 이상한 말씀이 나왔네'라고 내뱉으며 그냥 넘어갔었는데 최근 들어서 그 일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특히 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하시는 요즘이다...
Kedrick의 메세지에서도 그랬고, 이민아 목사님의 간증에서도, 몇 달 전에 많은 은혜를 받으며 보았던 이현숙 목사님의 간증과 설교에서도 아가서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왔었다. 더구나 교회를 옮기던 시기, 정목사님께서 보라고 추천해 주셨던 것이 마이크 비클의 아가서 강해였다는 사실 또한 우연이라고 넘겨버리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아가서를 많이 접하게 된 것 같다.
'이상하게 아가서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접하게 되네'라고 생각할 즈음 갑자기 올해 처음 받은 말씀이 아가서 1장 5절이라는 사실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다시 펼쳐서 아가서를 읽어보았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두번째로 다시 보았을 때에서야 아가서가 홀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Beloved, Friends, Lover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다시 보니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고, 내가 받았던 1장 5절 말씀이 Beloved가 노래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무언가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Beloved...
아...바로 나에대한 말씀이었구나!!
그런데 게달의 장막은 뭐지?
찾아보니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북아라비아 족속인데 그들이 사는 염소털로 만들어진 더럽고 지저분한 장막이 바로 게달의 장막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그와같은 존재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보신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블로그의 지난 몇 개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요즈음 나를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은 낮은 자존감과 낙담과 낙심이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왔던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하셨고,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라는 메세지를 계속해서 주셨다. 그런데 그런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씀이 바로 아가서 1장 5절인 것이다. 겉에서 보기에는 정말 더럽고 지저분하고 누추한 게달의 장막이라도 주님께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
날마다 믿음의 테스트에서 힘들어하고 주저 앉아도,
내가 정말 너를 눈동자같이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외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나는 보잘것 없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주님의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을 상황에서도,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건만 오늘도 이기적인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도,
주님은 우리의 좋은 점을 찾으시려 한다. 그리고 좋은 점이 하나도 없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아름답게 보시고, 주님께서 아름답게 봐 주신다는 그 사실을 통해 우리를 아름답게 하신다.
그 사랑이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2011년 한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 지금 깨닫고 있지만 주님은 2011년 한 해를 시작하는 그 때부터 말씀하신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인지...
아버지,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제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인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젠 저 스스로에게 고백하며 살려 합니다.
"너는 사랑받는 존재란다. 너는 아름다운 존재란다." 라구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특히 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하시는 요즘이다...
Kedrick의 메세지에서도 그랬고, 이민아 목사님의 간증에서도, 몇 달 전에 많은 은혜를 받으며 보았던 이현숙 목사님의 간증과 설교에서도 아가서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왔었다. 더구나 교회를 옮기던 시기, 정목사님께서 보라고 추천해 주셨던 것이 마이크 비클의 아가서 강해였다는 사실 또한 우연이라고 넘겨버리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아가서를 많이 접하게 된 것 같다.
'이상하게 아가서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접하게 되네'라고 생각할 즈음 갑자기 올해 처음 받은 말씀이 아가서 1장 5절이라는 사실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다시 펼쳐서 아가서를 읽어보았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두번째로 다시 보았을 때에서야 아가서가 홀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Beloved, Friends, Lover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다시 보니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고, 내가 받았던 1장 5절 말씀이 Beloved가 노래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무언가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Beloved...
아...바로 나에대한 말씀이었구나!!
그런데 게달의 장막은 뭐지?
찾아보니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북아라비아 족속인데 그들이 사는 염소털로 만들어진 더럽고 지저분한 장막이 바로 게달의 장막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그와같은 존재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보신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블로그의 지난 몇 개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요즈음 나를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은 낮은 자존감과 낙담과 낙심이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왔던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하셨고,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라는 메세지를 계속해서 주셨다. 그런데 그런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씀이 바로 아가서 1장 5절인 것이다. 겉에서 보기에는 정말 더럽고 지저분하고 누추한 게달의 장막이라도 주님께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
날마다 믿음의 테스트에서 힘들어하고 주저 앉아도,
내가 정말 너를 눈동자같이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외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나는 보잘것 없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주님의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을 상황에서도,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건만 오늘도 이기적인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도,
주님은 우리의 좋은 점을 찾으시려 한다. 그리고 좋은 점이 하나도 없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아름답게 보시고, 주님께서 아름답게 봐 주신다는 그 사실을 통해 우리를 아름답게 하신다.
그 사랑이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2011년 한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 지금 깨닫고 있지만 주님은 2011년 한 해를 시작하는 그 때부터 말씀하신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인지...
아버지,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제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인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젠 저 스스로에게 고백하며 살려 합니다.
"너는 사랑받는 존재란다. 너는 아름다운 존재란다." 라구요.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