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1:1-8

가깝게 교제하는 집사님 가정과 함께한 Thanksgiving이 끝나갈 무렵, 일과 진로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나를 위해 다같이 기도를 해주는 감사한 시간이 있었다. 여러가지 돌아보고 생각해 볼 많은 내용들이 다같이 기도를 하는 중에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야고보서 1장 3절 말씀을 묵상하길 원하신다는 내용이었다.

야고보서...
여전히 얄팍한 성경 지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야고보서는 그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만 인식되어 있었다. 사실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라는 것도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니 나의 성경지식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새삼 깨달으며 부끄러움이 먼저 올라왔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초반부를 읽으면서 내 심령의 중심을 찌르는 그 말씀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지금의 나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끊임없는 인내의 과정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시련이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나의 박사 과정과 지금 보내고 있는 포닥 과정은 내 인생에 있어 정말 큰 시련의 시기였고 또한 시기이다. 나는 고난과 시련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부러운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당사자는 시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도 막상 그 자신은 풍성한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유학 생활은 고난의 시기이자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간은 나의 신앙 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나 자신은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나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풀어가려는 삶을 살고 있던 나에게 던져진 신앙이라는 문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과제였다. 그저 잘 되기 위해서, 위로받기 위해서, 의지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 종교라는 생각으로 살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의 가장 큰 신앙적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인가?' 였다.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내가 진심으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게 인도해 달라는 것이 변치않는 나의 고정 기도 제목이었다. 그런 기도를 하면서, 내 노력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려는 시도를 하면서, 일에 있어서, 가정 생활에 있어서 나의 고난과 시련은 시작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모두가 다 나의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똑같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되풀이 되었지만 그 되풀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의지하는 나의 자세가 다듬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내 안의 불신앙의 찌꺼기들이 걸러져 나가고 있는 과정이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과정. 매번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두 손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렇기에 야고보서 1장 3절의 말씀은 내 심령 깊숙히 꽂히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은 계속해서 No! 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내함으로 묵묵히 가는 것. 이 인내의 길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느정도 신앙이 자리잡아 가면서 No!라는 상황을 맞딱뜨리게 되었을 때 나의 반응은 흔들림이었다.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단계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의심이었다, 즉 나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었다. '과연 내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것인가?, 혹시 지금의 힘든 상황이 잘못된 나의 선택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예전에 들은 주님의 음성이 맞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또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닐까?' 이런 의심들이 들어옴으로 인해 나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결국 객관적인 상황으로 인해 힘든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믿음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으로 힘들게 되는 것이 그동안 내가 힘들어 했던 고정 패턴이었다.  하지만 6-8절에서는 의심하지 말라는 내용이 확실히 나온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
매번 흔들리고 힘들어 할 때마다 보게 되는 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더 인내하고 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듣게 되면서 지금까지 온 것이고, 지난 Thanksgiving 연휴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자꾸 뒤돌아 본다면 당연히 앞으로 나가는 속도는 더디게 되고 혼미함으로 갈 방향을 쉽게 잃게 된다. 천천히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방향이 틀어지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의심이 있는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지도 말라고 했다. 우리는 의심없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한 구해야 한다. 믿음의 시련이 만들어 내는 인내는 아마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의 의심의 찌꺼기들을 제거해 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주님 손 붙잡고 인도하시는대로 따른다고 하면서 언제까지나 계속 크고 작은 의심들과 씨름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직접 보이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함께 먹고, 마시고, 장난치며 자라온 형이 갑자기 메시아라고 하면서 나선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후,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만난 야고보는 그 누구보다 굳건한 믿음을 보였다고 한다. 교회의 기둥으로 불리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직접 보여준 야고보.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행동으로 직접 보여줌으로써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본이됨과 동시에, 낙타 무릎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주님께 순종함으로 기도하며 나아간 그 모습은 의심 없는 믿음 그 자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얼마나 아깝고 원통했겠는가? 자신과 함께 자라온 친형이기에, 메시아라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를 거부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하게 여겨졌었겠는가? 아마도 그렇기에 그의 믿음은 더욱 흔들릴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의지한 나머지 예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믿음을 뒤흔드는 일들을 우리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음을,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음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는 경험들이 수두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의심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믿음의 시련이 찾아온다. 하지만 성경은 인내하라고 한다. 그냥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김으로 인내하라고 한다.

나의 믿음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 같다. 야고보의 믿음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 자신이 주님의 뜻을 알았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확고해서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았기에 비록 모든 것이 불확실하더라도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뒤돌아 보지 않는 것.
의심하지 않는 것.
그 분의 선하신 이끄심을 믿는 것.
설사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
그리고 순종함으로 무릎꿇고 참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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