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주님 안에서의 자유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렘 34:17

우리는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그 자유는 '주님 안에서의 자유'이어야 축복임을 깨닫는다.
만일 그 자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자유'라면 그 자체가 저주이자 고난이다.
지금 내가 꿈꾸는 자유는 100% '주님 안에서의 자유'인가?

2011년 12월 9일 금요일

거룩하라!!

지난 주일 찬양을 하는 가운데 주신 감동이 있었다.
투명하고 날이 잘 선 검을 보여주시며 사람들을 묶임에서 풀어주는 영적인 검이라 하셨다.
그리고 주시는 강한 감동은 '거룩하라!' 였다.

요즈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의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나 혼자 도닦듯 기도하고 말씀읽고 하는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통해, 그리고 성령으로 인한 열매 맺음으로 인해 주변 사람에게 영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그런 신앙생활을 강조하시는데 이번에는 나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그런 행동의 첫걸음이라는 것이었다.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영적인 검이 있다면, 그 검이 날카로워지고 칼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부지런히 그 칼날을 갈아 녹슬지 않게 관리할 때이다. 우리의 영적인 검이 우리에게 맡겨진 다른 영혼들을 묶고 있는 악한 영들의 기운을 베고 끊어 그들을 자유케 하는데 쓰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선 칼이 녹이 슬면 제대로 밸 수 없게된다. 너무 관리가 안되어 있다면 베는 것은 커녕 그저 튕겨나올 뿐이겠지만 어설프게 날카로운 정도라면 온전히 베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서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사람들을 자유케 하려는 나의 시도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는 경우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인가? 그렇기에 우리의 거룩함을 유지함으로 죄로부터 멀리하고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나의 성품적인 나약함이 성령 충만으로 제하여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날카롭고 투명한 영적인 검을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온갖 화려한 초식을 구사하며 휘두르지 않더라도, 잘 관리된 그 검은 모든 묶인 것을 베고, 자유함을 줄 수 있는 명검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그 과정 속에서 나도 자유케 될 수 있는 그 검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성령의 검은 말씀으로 나타난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서의 말씀이라면 그저 내가 살아가는 상황속에서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음을 받고, 나의 행동과 태도를 교정하며 취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씀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으려면 그 말씀이 말씀 자체로 머무르는 것을 넘어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 아니던가.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 야고보가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삶을 통해 말씀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였기 때문이라 믿는다.

내 삶의 거룩함을 이루고 지키기위해 조심하고, 분별하고, 노력해야 겠다. 악한 원수 마귀들이 교묘히 설치해 놓은 덫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조심하고, 상황으로 다가오는 문제와 고난들의 뒤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의도를 꿰뚫을 수 있도록 분별하고, 그런 상황과 맞닥뜨린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훈련의 목적을 깨달아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계속해서 같은 문제들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리고 내 안의 똑같은 연약함이 지속적으로 드러난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계시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던 김길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훈련은 문제를 통해 남을 바라보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내면을 조명하고 감찰하면서 내 안에서 제하여야 할 것들을 버리고 성령의 충만으로 채우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계속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거룩을 유지하는 길일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맺어진 성령의 열매를 나누는 것이 바로 사람들을 묶임에서 놓이게 하는 검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정말 하나님께 집중 과외를 받는 듯한 느낌이다. 지속적인 문제들이-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가지의 문제들이-계속해서 터져나오고 나를 뒤흔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의 마음의 어려움을 겪은 후 얻게되는 결론이 결국 이 모든것이 내 안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 감사할 일이다. 2011년을 얼마 남기지 않는 지금도 내 앞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런지 감도 안 잡히는 일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다가오는 걱정과 두려움 뒤에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깨닫고 스스로를 바꾸길 원하시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감사와 평강과 희망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아프지만 감사한 요즘...
내일은 또 어떤 문제로 나의 내면이 만져지고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갈 기회가 주어질지 조심스런 기대를 해본다.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포기할 것이냐?

돌아보면 참 핑계가 많은 삶이었다.
나는 늘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또한 그걸 핑계로 나 자신을 괴롭히며 살아온 것 같다.
거의 모든 시간을 실험실에서 일에 쫓기며 살아오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 당연히 삶의 패턴이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일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듯한 교수와 labmate들을 보면서 그들보다 상당히 적은 시간만을 일에 할애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일터에서 힘들었던 그런 삶이었다. 그렇기에 일이 맘대로 안풀리는 것 또한 내가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데서 이유를 찾으려 했었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속으로 나를 몰아가고 있었다.

주님께 더 나아가고, 더 경험하면서 그런 문제들로 부터 조금씩 자유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일에서는 많이 자유를 찾았지만 이제는 신앙적인 문제가 더해졌다.기도도 해야 하고 말씀도 읽어야 하는데 그런 일들을 하려면 나의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포기할 수 없기에 결국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일하는 시간을 더 줄여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물론 와이프와 아들 녀석이 잠든 후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 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늘 나는 너무 피곤하기에 도저히 집중해서 말씀을 보고 기도할 수 없다는 핑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다보면 자연스럽게 던져지는 질문이 내가 여기에서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Academia와 research를 고집하지 않고 회사가서 일하다보면 재정적인 문제도 풀릴 것이고 정해진 시간동안 일하면 되는 규칙적인 스케줄이 될 터이니 일에 묶이게 되는 것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될 터인데 왜 이렇게 힘들게 여기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과연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지금 내가 믿고 있듯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런 저런 고민에 시달리던 중 하루는 그냥 도서관에 가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이런 저런 회사들도 살펴보고, 다른 연구 그룹들도 보고, 만화책도 보고...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섞인 방황의 시간이었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런지 모르겠다. 막상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긴 했지만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너무나도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 있었다.

포기할 것이냐?
너는 그렇게 이런저런 핑계로 나를 포기할 것이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정말 나의 상황이 허락치 않는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로 주님과의 관계를 다른 일들 뒤로 미루어 놓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늘 고백하듯이 나의 생명되신 주님이라면 그분과의 시간을 그렇게 미루고 살지는 않았을텐데...

그날 이후 와이프와 승혁이가 잠든 시간부터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시작했다. 대부분 12시, 1시가 넘는 새벽 시간에 시작되기에 기도하다가 졸고, 말씀 보다가 졸기도 하지만 쉽게 멈출수가 없다. 너는 그렇게 나를 포기할 것이냐는 주님의 음성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나의 심령에서 들려오기에...물론 시간이 모든것을 보상할만큼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셨던 그 의도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걸 깨닫는다. 상황에 굴복하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정당화 하던 나약한 믿음...십자가가 우리의 내면에 선명하게 새겨질수록 우리의 삶의 비중은 주님께로 더 가까이 옮겨질 것이다. 내가 얼마만큼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다. 그저 우리의 하루 일상을 돌아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얼마나 그 분을 생각하며, 묻고, 의지하고 있는지.
나의 열심이-비록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일이라는 허울좋은 이유를 스스로 붙이더라도-어느덧 주님과는 상관없는 나만의 열심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멀어지고 나의 생각과 의지와 열심에 매달리게 될 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 뜻대로 일들이 풀려나가지 않을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께 원망섞인 푸념을 늘어놓으며 도망치게 된다. 도서관에서 빈둥대던 그날의 나도 그랬듯이.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것이 정말 큰 죄악이라고. 정말 큰 불순종이라고!!!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22:12-14

나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봤을때 밀려오는 실망감으로 주님을 원망하고 나의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태도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허무함만 줄 뿐이고, 하나님께는 죄악이 될 뿐인 것이다. 힘들고 마음이 어려울 때, 우리는 그 순간에도 이글거리는 불타는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주님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힘들다고 나를 포기할 것이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것만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좋은 것들은 대부분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좋은 것이고 지금의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좋은 것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러한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께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사 30: 9-10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경우 기다리라 하신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계획하신 뜻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 위해, 또 우리가 그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제대로 된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 기다리라 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이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축복이 바로 기다림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 30:18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주님의 그 분명한 음성을 기억한다면...
"나를 포기할 것이냐?"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 나를 두고 상황에 밀려 도망하는 것이냐?"
그 음성을 기억한다면 힘들어도 다시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그 뜻을 따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신실하신 주님을 믿기에...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기에...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 분의 사랑을 알기에...

2011년 12월 3일 토요일

고난의 이유: 김길 목사님의 '증언' 중에서

고난의 이유

고난이 오면 가장 먼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고난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고난을 이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난이 오면 마음이 어려운 상태라서 생각이 온전하기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생각은 대부분 마음을 낙담되게 하고 믿음이 없어지게 한다.
 욥기의 중요한 주제는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이다. 욥의 세 친구는 고난의 원인을 욥의 죄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 친구는 욥에게 죄를 회개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한다. 하나님을 만나서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는 결국 회개해야 했다. 물론 욥도 회개해야 했다.
 고난의 원인이 나의 죄라고 여기면 생각이 비뚤어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나의 죄를 세고 계신 분이고, 그 죄에 합당하게 고난을 주어 나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아는 것이다.
 고난이 올 때 그 원인을 찾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보통 그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욥의 부인이 그런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욥이 고난받고 있을 때 욥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8,9)

 보통 우리는 고난이 오면 그 원인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한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거나 적어도 막아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진정한 환란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간다. 내 믿음이 없어지고 원수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욥이 고난을 멈추게 하려면 믿음을 보여서 원수가 물러가게 해야 한다.
 고난은 멀쩡한 사람도 욥의 부인처럼 만든다. 고난이 올 때 넉넉히 이기는 사람을 잘 보지 못했다. 누구나 고난은 어렵다.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고난의 작은 모습만 보아도 그 고난이 장차 자기를 어떻게 괴롭힐지 알기 때문이다. 누구도 고난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예수님도 고난받으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예수님도 겪기 힘드신 고난을 어찌 우리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이길 수 있겠는가....
 고난은 잘 통과해야 한다기보다는 인내로 버텨야 하는 것이다. 고난이 오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정말로 깊은 고난에 빠지면 가족을 비롯해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하나님 앞에 혼자일 뿐이다. 고난이 올 때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어려워지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실망해서 그렇다.
 오직 나를 고난에서 건질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인줄 알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유일하게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인데 내 마음이 강퍅해져 있으면 기도도 나오지 않고 원망만 나오게 된다. 마음이 원망으로 가득하니 믿음이 있을 리 없고, 믿음이 없으니 역사가 일어날 리 없다. 모든 일은 우리의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원망하는 것이다. 원망함으로써 믿음이 없어지고 고난은 해결되지 않고, 우리는 사망을 향해 가게 된다.
 고난이 올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원망은 절대 안된다. 호소해야 한다. 어려울 때는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호소하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나요?' 하고 섣불리 묻지 말라.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호소해야 한다. 이 고난에서 벗어나도록 믿음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단지 그 고난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있음을 알 뿐이다. 이것이 가장 빠르게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다. 엄청난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기도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평상시 작은 고난이 왔을 때 잘 훈련해야 한다. 이유를 묻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배울 것을 배워야 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모든 사람이 인생은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인생이 뭐가 재미있기만 하겠는가. 어차피 인생은 고생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복되다. 고난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고난은 재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친해지려면 예수님의 핵심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정서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 고난을 이해할 때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

갓피플에서 e-book 서비스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김길 목사님의 '증언'이라는 책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예전에 말씀 몇 가지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기에-물론 공짜 좋아하는 나의 근성이 크게 한 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얼른 다운 받아서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참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고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수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이 울었다. 김길 목사님의 간증의 내용이 감동적인 것도 있었지만 비슷한 상황을 통해-나의 고난이 목사님의 고난과 비할바 못되겠지만-나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나의 심령에 울려퍼짐으로 회개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은 분명 고난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통해 성령 충만을 힘입어 나의 내면이 변화되어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의 원인을 묻기 전에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만들어 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열매를 맺은 것이 고난의 끝을 알리는 그 순간이 될 것이기에...


주님 저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그 열매를 맺길 원하나이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이사

요즈음 우리 랩에서는 많은 친구들이 떠나면서 desk space가 남아돌게 되었다.
이때다 싶은지 많은 친구들이 여기저기로 옮기기 시작하는데 나도 뒤늦게 동참을 하게 되었다.
손 대기도 싫을만큼 지저분해 진 책상을 정리하기도 싫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 있어서도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시점인 듯 해서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오피스로 옮겼는데 훨씬 작은 방이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쾌적하다!!

깨끗해진 책상을 보니 정신도 깨끗해 지는 듯.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연구에 정진해봐야겠다.
화이팅!!

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1:1-8

가깝게 교제하는 집사님 가정과 함께한 Thanksgiving이 끝나갈 무렵, 일과 진로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나를 위해 다같이 기도를 해주는 감사한 시간이 있었다. 여러가지 돌아보고 생각해 볼 많은 내용들이 다같이 기도를 하는 중에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야고보서 1장 3절 말씀을 묵상하길 원하신다는 내용이었다.

야고보서...
여전히 얄팍한 성경 지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야고보서는 그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만 인식되어 있었다. 사실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라는 것도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니 나의 성경지식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새삼 깨달으며 부끄러움이 먼저 올라왔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초반부를 읽으면서 내 심령의 중심을 찌르는 그 말씀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지금의 나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끊임없는 인내의 과정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시련이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나의 박사 과정과 지금 보내고 있는 포닥 과정은 내 인생에 있어 정말 큰 시련의 시기였고 또한 시기이다. 나는 고난과 시련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부러운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당사자는 시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도 막상 그 자신은 풍성한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유학 생활은 고난의 시기이자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간은 나의 신앙 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나 자신은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나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풀어가려는 삶을 살고 있던 나에게 던져진 신앙이라는 문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과제였다. 그저 잘 되기 위해서, 위로받기 위해서, 의지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 종교라는 생각으로 살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의 가장 큰 신앙적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인가?' 였다.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내가 진심으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게 인도해 달라는 것이 변치않는 나의 고정 기도 제목이었다. 그런 기도를 하면서, 내 노력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려는 시도를 하면서, 일에 있어서, 가정 생활에 있어서 나의 고난과 시련은 시작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모두가 다 나의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똑같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되풀이 되었지만 그 되풀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의지하는 나의 자세가 다듬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내 안의 불신앙의 찌꺼기들이 걸러져 나가고 있는 과정이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과정. 매번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두 손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렇기에 야고보서 1장 3절의 말씀은 내 심령 깊숙히 꽂히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은 계속해서 No! 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내함으로 묵묵히 가는 것. 이 인내의 길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느정도 신앙이 자리잡아 가면서 No!라는 상황을 맞딱뜨리게 되었을 때 나의 반응은 흔들림이었다.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단계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의심이었다, 즉 나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었다. '과연 내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것인가?, 혹시 지금의 힘든 상황이 잘못된 나의 선택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예전에 들은 주님의 음성이 맞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또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닐까?' 이런 의심들이 들어옴으로 인해 나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결국 객관적인 상황으로 인해 힘든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믿음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으로 힘들게 되는 것이 그동안 내가 힘들어 했던 고정 패턴이었다.  하지만 6-8절에서는 의심하지 말라는 내용이 확실히 나온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
매번 흔들리고 힘들어 할 때마다 보게 되는 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더 인내하고 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듣게 되면서 지금까지 온 것이고, 지난 Thanksgiving 연휴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자꾸 뒤돌아 본다면 당연히 앞으로 나가는 속도는 더디게 되고 혼미함으로 갈 방향을 쉽게 잃게 된다. 천천히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방향이 틀어지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의심이 있는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지도 말라고 했다. 우리는 의심없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한 구해야 한다. 믿음의 시련이 만들어 내는 인내는 아마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의 의심의 찌꺼기들을 제거해 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주님 손 붙잡고 인도하시는대로 따른다고 하면서 언제까지나 계속 크고 작은 의심들과 씨름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직접 보이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함께 먹고, 마시고, 장난치며 자라온 형이 갑자기 메시아라고 하면서 나선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후,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만난 야고보는 그 누구보다 굳건한 믿음을 보였다고 한다. 교회의 기둥으로 불리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직접 보여준 야고보.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행동으로 직접 보여줌으로써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본이됨과 동시에, 낙타 무릎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주님께 순종함으로 기도하며 나아간 그 모습은 의심 없는 믿음 그 자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얼마나 아깝고 원통했겠는가? 자신과 함께 자라온 친형이기에, 메시아라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를 거부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하게 여겨졌었겠는가? 아마도 그렇기에 그의 믿음은 더욱 흔들릴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의지한 나머지 예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믿음을 뒤흔드는 일들을 우리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음을,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음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는 경험들이 수두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의심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믿음의 시련이 찾아온다. 하지만 성경은 인내하라고 한다. 그냥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김으로 인내하라고 한다.

나의 믿음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 같다. 야고보의 믿음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 자신이 주님의 뜻을 알았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확고해서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았기에 비록 모든 것이 불확실하더라도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뒤돌아 보지 않는 것.
의심하지 않는 것.
그 분의 선하신 이끄심을 믿는 것.
설사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
그리고 순종함으로 무릎꿇고 참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2011년 11월 26일 토요일

Thanksgiving!!

한국으로 따지면 추석이 되려나?
Thanksgiving 연휴이다. 미국의 가장 큰 휴일중 하나인 Thanksgiving에는 가족들이 다 모여서 큼지막한 turkey를 구워먹고 다양한 음식을 나누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자그마한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자녀들이 성장하여 다른 주로 떠나 제각기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가면 쉽게 만나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기에 미국의 명절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명절을 지내온 나같은 경우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터키를 썰어 먹는 것도 그다지 큰 감동이 되질 않고 호박 파이나 사과 파이 같은 것도 '와~ 맛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보면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연이어 나오고 다같이 모여 웃고 떠드는 한국의 명절 문화가 훨씬 더 다이나믹하고 활기찬 느낌인 것 같다. 내가 한국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려나??

아무튼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집사님 가정을 초대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에 와서 여러가지 힘든 일들을 겪으시고 여전히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온 가족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가정이다.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다가 학교를 구경하러 갔다. 우리 학교야 워낙 작은 학교이기에 다 돌아보는데 20분도 채 안걸리는데 왠일인지 다같이 다니며 여기저기서 사진찍고 놀다보니 거의 2시간이 걸렸다. 매일 다니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구경을 시켜주다보니 학교 곳곳에 단풍이 이쁘게 져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들을 보면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면서, 즐거워하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는 아이들과 집사님 부부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매일매일 지나가는 일상이 되어있는 공간이 저들에게는 그렇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 번듯하게 지어놓은 공원도 아닌 그저 학교 캠퍼스일 뿐인데 곳곳을 온 가족이 함께 다니며 즐거워하는 모습...그들에게는 어찌보면 별 것 아닌 그 나들이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온 가족이 다함께 시간을 내서 모이기도 힘든 그 가정...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본 단풍과 낙엽으로 해맑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감사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동안 얼마나 감사함을 잊고 살았는지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일년동안의 수확물을 놓고 기뻐하는 가운데 축제를 벌이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Thanksgiving day.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그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나 생각해본다. 크리스찬이라고 하면서도 그저 Thanksgiving이면 터키를 주문해서 먹는것만 생각하고, Thanksgiving day 다음날인 Black Friday만을 고대하며 이번에는 또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더 나은 deal을 얻고자 새벽부터 mall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열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돌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부터도 고개숙여 회개케 된다. 감사함 보다는 가진것이 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어했던 어제의 모습이 떠올라 더 죄송하다. 일이 생각만큼 진행되지 않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하루종일 방황했던 며칠전 일이 생각나 또 아버지께 죄송했다.


도대체 감사하는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1-12

우리는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추수 감사절 감사 헌금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하나님의 마당에 고스란이 뿌려놓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헛된 수고와 노력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내 삶 중의 감사하는 마음을 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항상 감사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은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진실되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거울이라 생각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여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감사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바로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기에 행하지 못한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도대체 무엇을 듣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내가 기도할때도 자주 내뱉었던 말이기에 더 부끄러움을 느낀다.

기뻐하라고 하셨고, 기도하라 하셨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면-기쁨으로 충만해야하고, 감사가 넘쳐나야 하고, 늘 무릎꿇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려야 하는 날을 보내며,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매번 듣고 깨달아도, 잊고 잊고 또 잊는 나 자신에게도 한결같음으로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주님 말씀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