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주님 안에서의 자유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렘 34:17

우리는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그 자유는 '주님 안에서의 자유'이어야 축복임을 깨닫는다.
만일 그 자유가 '주님으로부터의 자유'라면 그 자체가 저주이자 고난이다.
지금 내가 꿈꾸는 자유는 100% '주님 안에서의 자유'인가?

2011년 12월 9일 금요일

거룩하라!!

지난 주일 찬양을 하는 가운데 주신 감동이 있었다.
투명하고 날이 잘 선 검을 보여주시며 사람들을 묶임에서 풀어주는 영적인 검이라 하셨다.
그리고 주시는 강한 감동은 '거룩하라!' 였다.

요즈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의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나 혼자 도닦듯 기도하고 말씀읽고 하는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통해, 그리고 성령으로 인한 열매 맺음으로 인해 주변 사람에게 영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그런 신앙생활을 강조하시는데 이번에는 나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그런 행동의 첫걸음이라는 것이었다.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영적인 검이 있다면, 그 검이 날카로워지고 칼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부지런히 그 칼날을 갈아 녹슬지 않게 관리할 때이다. 우리의 영적인 검이 우리에게 맡겨진 다른 영혼들을 묶고 있는 악한 영들의 기운을 베고 끊어 그들을 자유케 하는데 쓰임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선 칼이 녹이 슬면 제대로 밸 수 없게된다. 너무 관리가 안되어 있다면 베는 것은 커녕 그저 튕겨나올 뿐이겠지만 어설프게 날카로운 정도라면 온전히 베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서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사람들을 자유케 하려는 나의 시도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는 경우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인가? 그렇기에 우리의 거룩함을 유지함으로 죄로부터 멀리하고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나의 성품적인 나약함이 성령 충만으로 제하여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날카롭고 투명한 영적인 검을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온갖 화려한 초식을 구사하며 휘두르지 않더라도, 잘 관리된 그 검은 모든 묶인 것을 베고, 자유함을 줄 수 있는 명검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그 과정 속에서 나도 자유케 될 수 있는 그 검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성령의 검은 말씀으로 나타난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서의 말씀이라면 그저 내가 살아가는 상황속에서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음을 받고, 나의 행동과 태도를 교정하며 취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씀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으려면 그 말씀이 말씀 자체로 머무르는 것을 넘어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 아니던가.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 야고보가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삶을 통해 말씀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였기 때문이라 믿는다.

내 삶의 거룩함을 이루고 지키기위해 조심하고, 분별하고, 노력해야 겠다. 악한 원수 마귀들이 교묘히 설치해 놓은 덫들을 피해갈 수 있도록 조심하고, 상황으로 다가오는 문제와 고난들의 뒤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의도를 꿰뚫을 수 있도록 분별하고, 그런 상황과 맞닥뜨린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훈련의 목적을 깨달아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계속해서 같은 문제들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리고 내 안의 똑같은 연약함이 지속적으로 드러난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계시다는 것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던 김길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훈련은 문제를 통해 남을 바라보고, 판단하며,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내면을 조명하고 감찰하면서 내 안에서 제하여야 할 것들을 버리고 성령의 충만으로 채우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계속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거룩을 유지하는 길일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맺어진 성령의 열매를 나누는 것이 바로 사람들을 묶임에서 놓이게 하는 검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정말 하나님께 집중 과외를 받는 듯한 느낌이다. 지속적인 문제들이-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가지의 문제들이-계속해서 터져나오고 나를 뒤흔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의 마음의 어려움을 겪은 후 얻게되는 결론이 결국 이 모든것이 내 안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 감사할 일이다. 2011년을 얼마 남기지 않는 지금도 내 앞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런지 감도 안 잡히는 일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다가오는 걱정과 두려움 뒤에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깨닫고 스스로를 바꾸길 원하시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감사와 평강과 희망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아프지만 감사한 요즘...
내일은 또 어떤 문제로 나의 내면이 만져지고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갈 기회가 주어질지 조심스런 기대를 해본다.

2011년 12월 6일 화요일

포기할 것이냐?

돌아보면 참 핑계가 많은 삶이었다.
나는 늘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또한 그걸 핑계로 나 자신을 괴롭히며 살아온 것 같다.
거의 모든 시간을 실험실에서 일에 쫓기며 살아오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 당연히 삶의 패턴이 완전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일밖에 모르는 삶을 사는듯한 교수와 labmate들을 보면서 그들보다 상당히 적은 시간만을 일에 할애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일터에서 힘들었던 그런 삶이었다. 그렇기에 일이 맘대로 안풀리는 것 또한 내가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데서 이유를 찾으려 했었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속으로 나를 몰아가고 있었다.

주님께 더 나아가고, 더 경험하면서 그런 문제들로 부터 조금씩 자유하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일에서는 많이 자유를 찾았지만 이제는 신앙적인 문제가 더해졌다.기도도 해야 하고 말씀도 읽어야 하는데 그런 일들을 하려면 나의 일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또한 포기할 수 없기에 결국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일하는 시간을 더 줄여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물론 와이프와 아들 녀석이 잠든 후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면 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늘 나는 너무 피곤하기에 도저히 집중해서 말씀을 보고 기도할 수 없다는 핑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다보면 자연스럽게 던져지는 질문이 내가 여기에서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Academia와 research를 고집하지 않고 회사가서 일하다보면 재정적인 문제도 풀릴 것이고 정해진 시간동안 일하면 되는 규칙적인 스케줄이 될 터이니 일에 묶이게 되는 것으로 부터도 자유롭게 될 터인데 왜 이렇게 힘들게 여기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과연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지금 내가 믿고 있듯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런 저런 고민에 시달리던 중 하루는 그냥 도서관에 가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이런 저런 회사들도 살펴보고, 다른 연구 그룹들도 보고, 만화책도 보고...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섞인 방황의 시간이었다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런지 모르겠다. 막상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긴 했지만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너무나도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 있었다.

포기할 것이냐?
너는 그렇게 이런저런 핑계로 나를 포기할 것이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정말 나의 상황이 허락치 않는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로 주님과의 관계를 다른 일들 뒤로 미루어 놓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늘 고백하듯이 나의 생명되신 주님이라면 그분과의 시간을 그렇게 미루고 살지는 않았을텐데...

그날 이후 와이프와 승혁이가 잠든 시간부터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시작했다. 대부분 12시, 1시가 넘는 새벽 시간에 시작되기에 기도하다가 졸고, 말씀 보다가 졸기도 하지만 쉽게 멈출수가 없다. 너는 그렇게 나를 포기할 것이냐는 주님의 음성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나의 심령에서 들려오기에...물론 시간이 모든것을 보상할만큼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셨던 그 의도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걸 깨닫는다. 상황에 굴복하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정당화 하던 나약한 믿음...십자가가 우리의 내면에 선명하게 새겨질수록 우리의 삶의 비중은 주님께로 더 가까이 옮겨질 것이다. 내가 얼마만큼 주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다. 그저 우리의 하루 일상을 돌아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얼마나 그 분을 생각하며, 묻고, 의지하고 있는지.
나의 열심이-비록 주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일이라는 허울좋은 이유를 스스로 붙이더라도-어느덧 주님과는 상관없는 나만의 열심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멀어지고 나의 생각과 의지와 열심에 매달리게 될 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 뜻대로 일들이 풀려나가지 않을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께 원망섞인 푸념을 늘어놓으며 도망치게 된다. 도서관에서 빈둥대던 그날의 나도 그랬듯이.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것이 정말 큰 죄악이라고. 정말 큰 불순종이라고!!!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가라사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 22:12-14

나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봤을때 밀려오는 실망감으로 주님을 원망하고 나의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태도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허무함만 줄 뿐이고, 하나님께는 죄악이 될 뿐인 것이다. 힘들고 마음이 어려울 때, 우리는 그 순간에도 이글거리는 불타는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주님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힘들다고 나를 포기할 것이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것만을 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좋은 것들은 대부분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좋은 것이고 지금의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좋은 것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러한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께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사 30: 9-10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경우 기다리라 하신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계획하신 뜻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 위해, 또 우리가 그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제대로 된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 기다리라 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이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축복이 바로 기다림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 30:18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주님의 그 분명한 음성을 기억한다면...
"나를 포기할 것이냐?"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 나를 두고 상황에 밀려 도망하는 것이냐?"
그 음성을 기억한다면 힘들어도 다시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그 뜻을 따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신실하신 주님을 믿기에...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기에...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 분의 사랑을 알기에...

2011년 12월 3일 토요일

고난의 이유: 김길 목사님의 '증언' 중에서

고난의 이유

고난이 오면 가장 먼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고난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고난을 이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난이 오면 마음이 어려운 상태라서 생각이 온전하기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생각은 대부분 마음을 낙담되게 하고 믿음이 없어지게 한다.
 욥기의 중요한 주제는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이다. 욥의 세 친구는 고난의 원인을 욥의 죄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 친구는 욥에게 죄를 회개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한다. 하나님을 만나서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욥의 세 친구는 결국 회개해야 했다. 물론 욥도 회개해야 했다.
 고난의 원인이 나의 죄라고 여기면 생각이 비뚤어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나의 죄를 세고 계신 분이고, 그 죄에 합당하게 고난을 주어 나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아는 것이다.
 고난이 올 때 그 원인을 찾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보통 그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욥의 부인이 그런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욥이 고난받고 있을 때 욥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8,9)

 보통 우리는 고난이 오면 그 원인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한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거나 적어도 막아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진정한 환란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간다. 내 믿음이 없어지고 원수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욥이 고난을 멈추게 하려면 믿음을 보여서 원수가 물러가게 해야 한다.
 고난은 멀쩡한 사람도 욥의 부인처럼 만든다. 고난이 올 때 넉넉히 이기는 사람을 잘 보지 못했다. 누구나 고난은 어렵다.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고난의 작은 모습만 보아도 그 고난이 장차 자기를 어떻게 괴롭힐지 알기 때문이다. 누구도 고난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예수님도 고난받으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예수님도 겪기 힘드신 고난을 어찌 우리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이길 수 있겠는가....
 고난은 잘 통과해야 한다기보다는 인내로 버텨야 하는 것이다. 고난이 오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정말로 깊은 고난에 빠지면 가족을 비롯해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하나님 앞에 혼자일 뿐이다. 고난이 올 때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어려워지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의지하다가 실망해서 그렇다.
 오직 나를 고난에서 건질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인줄 알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유일하게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인데 내 마음이 강퍅해져 있으면 기도도 나오지 않고 원망만 나오게 된다. 마음이 원망으로 가득하니 믿음이 있을 리 없고, 믿음이 없으니 역사가 일어날 리 없다. 모든 일은 우리의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수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원망하는 것이다. 원망함으로써 믿음이 없어지고 고난은 해결되지 않고, 우리는 사망을 향해 가게 된다.
 고난이 올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원망은 절대 안된다. 호소해야 한다. 어려울 때는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호소하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나요?' 하고 섣불리 묻지 말라.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호소해야 한다. 이 고난에서 벗어나도록 믿음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단지 그 고난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있음을 알 뿐이다. 이것이 가장 빠르게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다. 엄청난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기도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평상시 작은 고난이 왔을 때 잘 훈련해야 한다. 이유를 묻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배울 것을 배워야 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모든 사람이 인생은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인생이 뭐가 재미있기만 하겠는가. 어차피 인생은 고생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복되다. 고난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고난은 재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친해지려면 예수님의 핵심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정서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 고난을 이해할 때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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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피플에서 e-book 서비스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김길 목사님의 '증언'이라는 책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예전에 말씀 몇 가지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기에-물론 공짜 좋아하는 나의 근성이 크게 한 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얼른 다운 받아서 읽어보았다. 읽으면서 참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고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수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이 울었다. 김길 목사님의 간증의 내용이 감동적인 것도 있었지만 비슷한 상황을 통해-나의 고난이 목사님의 고난과 비할바 못되겠지만-나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나의 심령에 울려퍼짐으로 회개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은 분명 고난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통해 성령 충만을 힘입어 나의 내면이 변화되어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의 원인을 묻기 전에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만들어 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열매를 맺은 것이 고난의 끝을 알리는 그 순간이 될 것이기에...


주님 저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그 열매를 맺길 원하나이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2011년 11월 30일 수요일

이사

요즈음 우리 랩에서는 많은 친구들이 떠나면서 desk space가 남아돌게 되었다.
이때다 싶은지 많은 친구들이 여기저기로 옮기기 시작하는데 나도 뒤늦게 동참을 하게 되었다.
손 대기도 싫을만큼 지저분해 진 책상을 정리하기도 싫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 있어서도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시점인 듯 해서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오피스로 옮겼는데 훨씬 작은 방이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쾌적하다!!

깨끗해진 책상을 보니 정신도 깨끗해 지는 듯.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연구에 정진해봐야겠다.
화이팅!!

2011년 11월 29일 화요일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1:1-8

가깝게 교제하는 집사님 가정과 함께한 Thanksgiving이 끝나갈 무렵, 일과 진로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나를 위해 다같이 기도를 해주는 감사한 시간이 있었다. 여러가지 돌아보고 생각해 볼 많은 내용들이 다같이 기도를 하는 중에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야고보서 1장 3절 말씀을 묵상하길 원하신다는 내용이었다.

야고보서...
여전히 얄팍한 성경 지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야고보서는 그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만 인식되어 있었다. 사실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라는 것도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니 나의 성경지식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새삼 깨달으며 부끄러움이 먼저 올라왔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초반부를 읽으면서 내 심령의 중심을 찌르는 그 말씀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지금의 나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끊임없는 인내의 과정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시련이냐고 할수도 있겠지만 나의 박사 과정과 지금 보내고 있는 포닥 과정은 내 인생에 있어 정말 큰 시련의 시기였고 또한 시기이다. 나는 고난과 시련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부러운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당사자는 시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도 막상 그 자신은 풍성한 감사와 기쁨 속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유학 생활은 고난의 시기이자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시간은 나의 신앙 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나 자신은 기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나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풀어가려는 삶을 살고 있던 나에게 던져진 신앙이라는 문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과제였다. 그저 잘 되기 위해서, 위로받기 위해서, 의지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 종교라는 생각으로 살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의 가장 큰 신앙적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인가?' 였다.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내가 진심으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게 인도해 달라는 것이 변치않는 나의 고정 기도 제목이었다. 그런 기도를 하면서, 내 노력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려는 시도를 하면서, 일에 있어서, 가정 생활에 있어서 나의 고난과 시련은 시작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모두가 다 나의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똑같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되풀이 되었지만 그 되풀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의지하는 나의 자세가 다듬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내 안의 불신앙의 찌꺼기들이 걸러져 나가고 있는 과정이다. 참고, 참고, 또 참는 과정. 매번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두 손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렇기에 야고보서 1장 3절의 말씀은 내 심령 깊숙히 꽂히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은 계속해서 No! 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내함으로 묵묵히 가는 것. 이 인내의 길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느정도 신앙이 자리잡아 가면서 No!라는 상황을 맞딱뜨리게 되었을 때 나의 반응은 흔들림이었다.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단계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에 대한 의심이었다, 즉 나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었다. '과연 내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은 것인가?, 혹시 지금의 힘든 상황이 잘못된 나의 선택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예전에 들은 주님의 음성이 맞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또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닐까?' 이런 의심들이 들어옴으로 인해 나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결국 객관적인 상황으로 인해 힘든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믿음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으로 힘들게 되는 것이 그동안 내가 힘들어 했던 고정 패턴이었다.  하지만 6-8절에서는 의심하지 말라는 내용이 확실히 나온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
매번 흔들리고 힘들어 할 때마다 보게 되는 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더 인내하고 참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듣게 되면서 지금까지 온 것이고, 지난 Thanksgiving 연휴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자꾸 뒤돌아 본다면 당연히 앞으로 나가는 속도는 더디게 되고 혼미함으로 갈 방향을 쉽게 잃게 된다. 천천히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방향이 틀어지는 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의심이 있는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지도 말라고 했다. 우리는 의심없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한 구해야 한다. 믿음의 시련이 만들어 내는 인내는 아마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의 의심의 찌꺼기들을 제거해 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주님 손 붙잡고 인도하시는대로 따른다고 하면서 언제까지나 계속 크고 작은 의심들과 씨름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직접 보이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함께 먹고, 마시고, 장난치며 자라온 형이 갑자기 메시아라고 하면서 나선다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후,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만난 야고보는 그 누구보다 굳건한 믿음을 보였다고 한다. 교회의 기둥으로 불리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직접 보여준 야고보.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행동으로 직접 보여줌으로써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본이됨과 동시에, 낙타 무릎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주님께 순종함으로 기도하며 나아간 그 모습은 의심 없는 믿음 그 자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얼마나 아깝고 원통했겠는가? 자신과 함께 자라온 친형이기에, 메시아라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를 거부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하게 여겨졌었겠는가? 아마도 그렇기에 그의 믿음은 더욱 흔들릴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의지한 나머지 예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믿음을 뒤흔드는 일들을 우리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음을,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음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깨닫는 경험들이 수두룩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의심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믿음의 시련이 찾아온다. 하지만 성경은 인내하라고 한다. 그냥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김으로 인내하라고 한다.

나의 믿음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 같다. 야고보의 믿음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 자신이 주님의 뜻을 알았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확고해서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았기에 비록 모든 것이 불확실하더라도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뒤돌아 보지 않는 것.
의심하지 않는 것.
그 분의 선하신 이끄심을 믿는 것.
설사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
그리고 순종함으로 무릎꿇고 참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2011년 11월 26일 토요일

Thanksgiving!!

한국으로 따지면 추석이 되려나?
Thanksgiving 연휴이다. 미국의 가장 큰 휴일중 하나인 Thanksgiving에는 가족들이 다 모여서 큼지막한 turkey를 구워먹고 다양한 음식을 나누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자그마한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자녀들이 성장하여 다른 주로 떠나 제각기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가면 쉽게 만나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기에 미국의 명절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명절을 지내온 나같은 경우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터키를 썰어 먹는 것도 그다지 큰 감동이 되질 않고 호박 파이나 사과 파이 같은 것도 '와~ 맛있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보면 수많은 종류의 음식이 연이어 나오고 다같이 모여 웃고 떠드는 한국의 명절 문화가 훨씬 더 다이나믹하고 활기찬 느낌인 것 같다. 내가 한국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려나??

아무튼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집사님 가정을 초대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에 와서 여러가지 힘든 일들을 겪으시고 여전히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온 가족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가정이다.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다가 학교를 구경하러 갔다. 우리 학교야 워낙 작은 학교이기에 다 돌아보는데 20분도 채 안걸리는데 왠일인지 다같이 다니며 여기저기서 사진찍고 놀다보니 거의 2시간이 걸렸다. 매일 다니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구경을 시켜주다보니 학교 곳곳에 단풍이 이쁘게 져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들을 보면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면서, 즐거워하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는 아이들과 집사님 부부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매일매일 지나가는 일상이 되어있는 공간이 저들에게는 그렇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 번듯하게 지어놓은 공원도 아닌 그저 학교 캠퍼스일 뿐인데 곳곳을 온 가족이 함께 다니며 즐거워하는 모습...그들에게는 어찌보면 별 것 아닌 그 나들이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온 가족이 다함께 시간을 내서 모이기도 힘든 그 가정...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본 단풍과 낙엽으로 해맑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감사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동안 얼마나 감사함을 잊고 살았는지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일년동안의 수확물을 놓고 기뻐하는 가운데 축제를 벌이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Thanksgiving day.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그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나 생각해본다. 크리스찬이라고 하면서도 그저 Thanksgiving이면 터키를 주문해서 먹는것만 생각하고, Thanksgiving day 다음날인 Black Friday만을 고대하며 이번에는 또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더 나은 deal을 얻고자 새벽부터 mall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열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돌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부터도 고개숙여 회개케 된다. 감사함 보다는 가진것이 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어했던 어제의 모습이 떠올라 더 죄송하다. 일이 생각만큼 진행되지 않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하루종일 방황했던 며칠전 일이 생각나 또 아버지께 죄송했다.


도대체 감사하는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1-12

우리는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추수 감사절 감사 헌금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하나님의 마당에 고스란이 뿌려놓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헛된 수고와 노력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내 삶 중의 감사하는 마음을 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항상 감사하는 것. 감사하는 마음은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진실되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거울이라 생각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여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삶에 감사함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바로 행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기에 행하지 못한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도대체 무엇을 듣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내가 기도할때도 자주 내뱉었던 말이기에 더 부끄러움을 느낀다.

기뻐하라고 하셨고, 기도하라 하셨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면-기쁨으로 충만해야하고, 감사가 넘쳐나야 하고, 늘 무릎꿇고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려야 하는 날을 보내며,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매번 듣고 깨달아도, 잊고 잊고 또 잊는 나 자신에게도 한결같음으로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알려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주님 말씀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합니다!!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치유의 길 II

그 분이, 아니 그 녀석이 다시 왔다...-.-;;
지난주부터 콕콕 다시 쑤시며 찾아온 편두통. 이번에는 오른쪽과 왼쪽을 함께 찌르는 통에 더 신경이 쓰이고 힘들었던 듯.
큰매형과 큰누나가 보내준 약도 잘 듣지를 않고...

지난번 예배드리며 찬양할 때 깨끗이 나았기에 (http://youngshikshin.blogspot.com/2011/10/blog-post_12.html) 이번에도 그렇게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어제 주일 예배도 참석했건만, 예배후에도 그다지 달라진 건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더 심해진듯한 느낌까지 있었기에 실망이 조금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강도가 더 심해져서 급기야는 와이프와 승혁이에게 짜증까지 내고 말았다. 이게 머리를 계속 찌르다보니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물론 나의 인격이 아직 그정도를 참아낼만큼이 안되는게 더 큰 이유겠지...빨리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달아서 이런 일도 웃으며 넘길 수 있어야 할 터인데...ㅋㅋ

계속 아프다 보니 급기야 이게 정말 바울이 얘기한 육체의 가시같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거 평생 이렇게 아픈걸 달고 살아야 하는거 아니야?'하는 걱정과 함께. 정말이지 두려움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귀신이 귀신같이 나의 가장 나약한 곳을 보고 두려움의 씨앗을 심어주고 있는걸 번번히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아무튼 점점 더 심해지는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서 아침에 학교로 향하기 전 차 안에서 잠시 기도를 했다. 기도라기보다는 그저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주님...아무리 대적하고, 결박하는 기도를 해도...주님의 능력을 믿고 제가 선포해도 계속 아프네요. 이게 정말 주님께서 말씀하신 '센 놈', '이런 유'인가 봐요 (막 9:29). 저는 이제 능력이 없으니 주님께서 직접 만져주세요.'

이렇게 고백하며 그냥 눈감고 앉아있는데, 15분쯤 지났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오늘은 약을 먹은 것도 아니기에 약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저 주님이 고쳐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나의 반응은 '할렐루야!!'라기 보다는 '이게 뭐지?'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큰 떨림이나 강력한 성령의 임하심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만 감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는데...굉장히 피곤하다는 생각만 잠시 했었는데...혹시 잠들었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눈을 떴을때 통증이 사라지다보니 왠지 조금 밋밋한 느낌이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통증이라는 나의 문제에 이끌려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갖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어쩌면 기도라는 도구로 나의 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결국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라는, 궁극적으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을 또 잠시 잊고 있었나보다. 실제로 많은 치유 사역자들이 기도를 통해 사람들을 치유하지만 결국 그 치유의 역사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일이다. 믿음으로 선포하고 기도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또한 중요한 치유의 과정, 아니 기도 응답의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잠잠히 기다리는 것.

우리는 얼마나 이 중요한 스텝을 놓치며 살고 있는 것인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쉽게 잊게 되는 것 같다.

같은 증상이었지만 여전히 다른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나의 생각과 의지에 기대어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얼마나 정확히 집어내시는지 매번 나의 생각과 정확히 반대 상황으로 역사하심으로 나의 생각을 깨시곤 한다. 그렇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밖에 없다...

Thanksgiving Day가 있는 한 주.
더 많은 감사할 일들로 채워질 것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2011년 11월 15일 화요일

찬양과 경배는 크리스찬의 특권입니다

고난의 시기...
정말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런지 모르겠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11월 11일.
하나님께서 반전을 보여주실 날이라고 믿음으로 취했던 그 날.
매일 안되는 일 뿐이니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할 겸 그나마 예전에 잘 되었던 일을 다시 한 번 테스트 해 보기로 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시작한 일이건만 결국은 예전처럼 안되는 것을 확인했고 이제는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실패에도 무덤덤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와이프를 통해, 그리고 몇몇의 지인들을 통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아서였는지 그다지 실망감도 좌절도 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답답함은 여전히 있었지만...

하루 일을 마감하고 지하의 실험실에서 나와 어둑어둑한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게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는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이제는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절망의 상황일지라도 크리스찬이라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면 아버지를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높여드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성령님을 사랑한다는 그 고백은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집으로 향하는 길,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 찬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계속해서 올려드리는 가운데 평안이 찾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기쁨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내일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더이상 무언가 시도해볼만한 조건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잔잔한 기쁨이 찾아왔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
성령님의 능력을 믿는 것.

이 모든 일들은 믿음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특권.
그렇기에 감사하다.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을 관장하는 이성이라는 시스템은 마치 바이러스 백신의 실시간 감시 서비스와 같이 우리 삶의 문제들을 찾아내 적색 경고등을 켜게 한다. 무언가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 않을 때, 세상적인 기준으로 조심하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다가올 때, 우리의 이성은 많은 적색 경고등을 밝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문제에 집중케 한다. 하지만 그 경고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우리의 온 생각이 그 문제로 집중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접하게 된다. 우리의 온 신경이 그 문제에 사로 잡히게 될 때, 그 문제는 점점 더 커지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잊게되곤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도 우리의 온 생각은 그 문제에 사로잡혀버린 채 다른 모든 것은, 심지어 내 삶의 주인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주님까지도 잊게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특권까지도 까맣게 잊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주님뿐이라고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주님이 아니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머릿속의 생각은 온통 그 문제 생각 뿐이다. 해결책을 찾아내느라 쉬지않고 계속해서 돌아가는 그 머릿속에서 더이상 찬양도, 경배도, 사랑 고백도 찾아볼 수 없게 될 때...바로 그 상황이 영적인 적색 경고등이 켜져있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눈물 펑펑 흘리며 인상깊게 보았던 김용의 선교사님의 '예수면 다다'라는 영상이 떠올랐다 (http://www.youtube.com/watch?v=MK6cSQjNQG4).
예수면 다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문제가 없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아니 인생 자체가 문제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예수면 다다!'라고 외치는 김용의 선교사님처럼 우리도 나의 이성이 경고하는 문제의 적색 경고등을 뒤로하고 우리의 특권을 누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고 찬양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영적인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것.
그 특권을 잊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할 것이다.

2011년 11월 7일 월요일

껌딱지의 영성

살다보면 이상하게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걸 경험하게 된다. 그것도 힘들어서 더이상 겪고싶지 않은 그런 일들이...
똑같은 상황이 잊을만하면 한번씩 찾아와서 힘들게 하는걸 보면 분명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고 싶어하시는 무언가가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생각해보는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떠오르는게 껌딱지였다. 그것도 쫄깃하고 찐득한 껌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과일향 폴폴 나는 그런 껌이 아니라 바닥이 착 붙어서 밟히고 밟혀 시커멓게 먼지로 덮혀버린 그런 껌딱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과연 반복되는 문제들과 껌딱지에 무슨 관계가 있을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보도블럭 한 복판에 붙어있는 껌은 그저 밟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히는...
아마도 처음에는 누군가의 발에 밟혀 그 신발 밑창에 붙어 딸려갈 뻔 하기도 했을 것이고 거뭇거뭇 묻어나는 먼지들 사이로 불그스름한 속살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밟는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히는 사이 껌은 더 넓게 퍼져 바닥에 더 강하게 붙게되고 더 많은 먼지가 묻어 사람들의 신발 밑창에 딸려 갈 확률은 점점 더 낮아지겠지.

어쩌면 이것이 반복되는 문제에 있어서의 핵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세상을 향해 소리없는 외침으로 부르짖으며 살고 있다.
나는 힘들다고.
나는 아프다고.
나는 외롭다고.
나 좀 이해해 달라고.
나는 잘 났다고.
나는 똑똑하다고.
나 좀 알아달라고.
나 좀 인정해 달라고.
말로 내뱉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런것들을 구하며 세상으로 나아갈 때가 많다.
내 안의 자아가 살아서 펄펄 뛰어 놀아 그럴수도 있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내면에서 키워온 상처를 통한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세상을 향해 우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경우 우리에게 잠잠하라 하신다.
그저 붙어있으라 하신다.
밟히고 밟히고 또 밟혀 더이상 납작해질 수 없을 것만큼 납작해진 껌딱지 처럼...
겉은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으로 이제는 아무런 끈기도 남아있지 않지만 땅바닥에 붙어있는 아랫부분은 여전히 끈적한 불그스름한 속살을 간직하고 있고, 밟힌만큼 더 강하게 바닥에 붙어있게 되는 그런 껌딱지처럼...

개인적으로 우리가 겪게 되는 관계의 문제를 나는 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사람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나 상황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고난에 있어 나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을 모두 다 내 구미에 맞게 바꿀수도 없고, 상황을 갑자기 나에게 호전적으로 바꾸는 것도 나의 힘으로는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바뀌는 것이다. 내 힘을 키워 그들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것을 꿈꾸기 보다는 그저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외부로부터 나의 내면으로 돌격해 오는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무덤덤해지는 것.
밟히고 밟혀서 더이상 사람들의 밟힘에 반응하지 않는 껌딱지처럼 우리는 예전에 그렇게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했던 문제들에 무덤덤해질 수 있다.
그저 바닥에 붙어있기만 하면...
물론 신발에 딸려나가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지. 내가 바뀌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임을 깨달으며 제발 나 좀 바꿔달라고 간구하면서...
그저 주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그 분을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 수록 우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세상을 향한 끈기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일이 있다면...
더구나 그 힘든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아마도 그 때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들, 그 상황들을 향해 나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문제들을 돌아보면서 그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간구하다보면
이전에는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문제들이 차츰 별 것 아닌 문제들이 되어나갈 것이고
어쩌면 껌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같은 고난이 어느 순간 더 기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와 하나님을 더 가깝게 만들어 줄 것이기에, 내가 하나님께 더 강하게 붙어있을 수 있게 해 줄 것이기에....

더구나 주님은 내가 세상을 향해 먼지만을 드러내고 주님을 향해 끈기를 보일때 우리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약속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 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7-8

지금 내가 껌딱지와 같이 여겨진다면 지금이 감사할 때일 것이다.
반복되는 문제는 나의 내면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일테니...
그리고 그저 주님께만 붙어있으면 그 모든 문제가 더이상 문제가 아닌 축복이 되고 우리가 맺어나갈 과실의 씨앗이 될 터이니...

오늘부터는 길바닥의 껌딱지를 보면 기분 좋게 웃으며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나는 아름답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아 1:5

2011년을 맞이하던 날, 전에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께서 다같이 기도를 하고 2011년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보자고 하셨다. 기도를 하고, 눈을 감고, 성경을 펼쳐 손으로 찍은 말씀을 믿음으로 받자는 것이었는데 내가 받은 말씀은 아가서 1장 5절 말씀이었다.
나름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뜨고 이 말씀을 확인했을때 솔직히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직 아가서를 제대로 묵상해 본 적도 없었던 데다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그런 말씀이었기에 그랬고, 더 나아가 한참 하나님을 깊게 만나기 시작했을 때이기에 무언가 근사해 보이는 말씀을 기대한데서 온 실망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와이프에게도 그저 '난 이상한 말씀이 나왔네'라고 내뱉으며 그냥 넘어갔었는데 최근 들어서 그 일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특히 나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게 하시는 요즘이다...
Kedrick의 메세지에서도 그랬고, 이민아 목사님의 간증에서도, 몇 달 전에 많은 은혜를 받으며 보았던 이현숙 목사님의 간증과 설교에서도 아가서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왔었다. 더구나 교회를 옮기던 시기, 정목사님께서 보라고 추천해 주셨던 것이 마이크 비클의 아가서 강해였다는 사실 또한 우연이라고 넘겨버리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아가서를 많이 접하게 된 것 같다.

'이상하게 아가서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접하게 되네'라고 생각할 즈음 갑자기 올해 처음 받은 말씀이 아가서 1장 5절이라는 사실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다시 펼쳐서 아가서를 읽어보았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두번째로 다시 보았을 때에서야 아가서가 홀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Beloved, Friends, Lover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다시 보니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고, 내가 받았던 1장 5절 말씀이 Beloved가 노래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무언가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Beloved...
아...바로 나에대한 말씀이었구나!!

그런데 게달의 장막은 뭐지?
찾아보니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북아라비아 족속인데 그들이 사는 염소털로 만들어진 더럽고 지저분한 장막이 바로 게달의 장막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그와같은 존재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보신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블로그의 지난 몇 개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요즈음 나를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은 낮은 자존감과 낙담과 낙심이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왔던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하셨고,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라는 메세지를 계속해서 주셨다. 그런데 그런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씀이 바로 아가서 1장 5절인 것이다. 겉에서 보기에는 정말 더럽고 지저분하고 누추한 게달의 장막이라도 주님께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

날마다 믿음의 테스트에서 힘들어하고 주저 앉아도,
내가 정말 너를 눈동자같이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외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나는 보잘것 없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주님의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을 상황에서도,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건만 오늘도 이기적인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도,
주님은 우리의 좋은 점을 찾으시려 한다. 그리고 좋은 점이 하나도 없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아름답게 보시고, 주님께서 아름답게 봐 주신다는 그 사실을 통해 우리를 아름답게 하신다.
그 사랑이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2011년 한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 지금 깨닫고 있지만 주님은 2011년 한 해를 시작하는 그 때부터 말씀하신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인지...

아버지,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제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인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젠 저 스스로에게 고백하며 살려 합니다.
"너는 사랑받는 존재란다. 너는 아름다운 존재란다." 라구요.

2011년 10월 28일 금요일

오직 믿음으로

저의 지성으로는 저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수많은 일들이 있는 요즈음입니다.
제가 왜 이 곳에서 이렇게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냥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을 왜이리 실패의 경험으로 채워나가야 하는지
저에게 왜 승리하는 크리스찬 보다는 실족하고 힘들어하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여 주시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에
앞서 나갈 수도 없고 샛길로 달음질쳐 도망갈 수도 없는, 그저 주님께서 한걸음 내 딛으시길 기다리는 동행하는 길이기에,
앞으로 어느 곳으로 인도하실지
언제 떠나라 하실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것은 주님께서 저에게 이곳에 있으라 하셨고 잠잠히 기다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다립니다.
그렇기에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땅이 비에 젖어 질척거릴지라도
오랜 기근으로 쩍쩍 갈라져가는 메마른 땅이라 할 지라도
주님이 기다리라면 끝까지 기다리고
주님이 같이가자면 끝까지 동행하길 원합니다.

그 아무리 질척거리는 땅일지라도
그 아무리 메마른 땅일지라도 
주님이 씨 뿌리시면 
언젠가 과실을 맺을 것을 믿기에
오늘도 기다리고 순종합니다.

제 이성과 지성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제 논리로는 안 될 것 같지만
그렇기에 100% 믿음을 보여드릴 순 없지만
그저 그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걸어가길 원합니다.

주님 오늘도 손 붙잡아 주시옵소서.



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나를 사랑하기

요즈음 계속해서 받는 메세지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

어제 교회에는 guest speaker로 Kedrick Pinex이 왔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들로 기대하고 갔었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때는 정말 'Amazing'을 연달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생일과 이름을 통해 예언을 하고 메세지를 전달하는 그의 은사는 참으로 놀랍고 또한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은사와 예언을 떠나서 그가 전한 메세지 자체가 나를 향한 개인적인 터치가 있었던 것이기에 더 좋은 시간이었다.

사실 요즘 나의 짜증 지수는 상당히 높아져있다.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고 그로 인해 가족들도 힘들어할만큼 분쟁과 분열의 요소가 되고 있는데도 콘트롤이 잘 되질 않는다. 어제 교회에서 은혜받고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해서 짜증과 못마땅함이 올라오는 걸 참을수가 없었다. 보통 내면에 쌓아두었던 상처나 억압하고 있던 감정이 나갈 때는 그 상처나 억압된 감정이 드러나면서 나갈 때가 많다는 걸 많이 듣고 보았기에 내 안의 짜증과 못마땅함이 나가려고 그러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며칠을 보냈는데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감정 속에서 무언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음을 느꼈다. 와이프와도 계속해서 마찰이 있는 가운데 와이프가 기도하면서 나의 완벽주의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모든 짜증과 혈기가 나의 완벽주의에서 오는 것이고 그 완벽주의는 또한 나의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오늘 하루를 보내며 생각해보니 정답인 것 같다. 나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님의 기대와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나에 대한 기대...그런 기대에 부흥하고 인정받기 위한 노력들. 결혼 후에는 와이프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그 욕심으로 나 자신을 혹사하고 끊임없이 무엇으로부턴가 쫓기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결국 나 자신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완벽주의 때문에 더 불행하고 힘든 시간을 스스로 초래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침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몇가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동안 참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를 위해서는 무엇하나 사지도 못하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는 노력은 거의 없이 살았던 나의 모습은 결국 나로 하여금 지치게 하고 또한 자유롭지 못하게 한 것 같다. 맛있는 걸 먹어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와이프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어디를 놀러가도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와이프를 위한 것이었다.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을 가면서도 나는 결코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부담만 느꼈던 그런 시간이 된 것이다 (물론 와이프와 가족들은 그저 공급받기만을 바란 것이 아니라 함께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또한 즐기는 것을 기대했음은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는 노력하는데 왜 사람들은, 나의 가족들은, 나의 와이프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하는 서운함을 내 안에 쌓아가게 되고, 그런 서운함은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다. 그 서운함은 또한 결국 내가 하는 일은 다 안 된다는 생각과,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낮은 기대감과, 또한 스스로를 보잘것 없게 보는 낮은 자존감으로 나를 주저 앉히곤 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돌이켜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그 사랑의 대상을 '우리'라고 정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렇기에 예수님의 심장을 달라고 구하면서 그 심장은 내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의 시선을 돌리며 그들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깨닫는건 그 예수님의 심장은 나에게로 먼저 와서 나의 온 몸에 주님의 보혈을 펌프질함으로 나를 소생시키고,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 우선 순위이라는 것이다. 

Kedrick이 전한 Knowing the love of God이라는 메세지도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문을 여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주님은 사랑하라 하신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하신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임을 생각케 한다. 
과연 나는 이 사랑을 품고 있었던가?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늘 깨닫고 있었던가?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하찮게 여기고 무능력하게만 여기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 전에 내가 그 사랑을 느끼고 또한 그 사랑을 통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가?

Kedrick 역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걸 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그 말에 100% 동의한다. 주변에서 소위 우울증으로 고생한다며 힘들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얼굴 표정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너무나도 경직된 표정으로 살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쉽게 티가 난다. 무엇을해도 기뻐보이고 활기가 있어 보인다. 이제는 그런 사랑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기에...그리고 또한 그 사랑을 전해야 할, 사랑에 빠진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품고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기뻐서 활력이 있어야 할 그 사랑하는 모습이 의무감으로 변질되어 너무나도 쉽게 지치고 서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즈음 나에게 계속해서 가만히 엎드려 있으라는 감동을 주셨다. 나는 그저 내 교만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기 위해 나를 낮추라는 말씀인가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공급받고 그 공급받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라는 메세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시 131

어미 품에 있는 젖 뗀 아이...
그 아이에게는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짊어지고 가야 할 부담감도 없다.
그저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 품에 안겨 있으면 그것 자체로 만족이다.
젖을 뗀 아이가 안겨 있을 때는 살기위해 빨아야 하는 그 행위도 없다.
그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것이고, 그 순간이 그 아이에게는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상황이다. 크게 무언가 이루려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나를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런 큰 일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 실패가 찾아오더라도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 내가 나를 바라보며 사랑을 전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내적치유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이제는 가만히 엎드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사랑을 구하고 그 넘치는 사랑에 기뻐하며 그 사랑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꾸준히 가져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겠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잊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전할 수 있을테니.

2011년 10월 21일 금요일

소유와 직업에도 불세례를 받으십시오-장봉운 목사님

여러가지 일들로 참 쉽지 않은 요즘이다. 주님께 붙어있으려고 노력하면서 또한 그 분을 더 알아가려고 노력하면서 열심을 내긴 하는데 상황적으로는 더 힘들어지고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러던 중 장봉운 목사님의 소유와 직업에서의 불세례에 대한 글을 접하면서 많은 위로와 또한 도전을 받았다. 정말 목사님의 글처럼 나 자신도 나의 구원은 오직 영과 육의 문제라고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소유와 직업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정의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다 물세례와 불세례를 받아 거듭날 때에 우리가 완전히 새로워짐을 기억해야겠다.


오늘 아침 갑자기 기차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졌었다. 여러가지 일들로 분주하고, 힘들고 또한 영적으로 싸우느라 지쳐서였을까? 한적한 시골길을 경쾌한 진동음과 함께 달리는 그런 기차 여행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삶은 계란을 깨어먹는 재미도 빠질 수 없겠지...ㅋㅋㅋ 왜 기차 여행이 좋은 것이고 운치가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담한 기차역에서의 정차였다. 기차를 타고 가기만 하는 것은 지루하다. 처음에는 신나고 휴식이 되는 여행이겠지만 계속해서 달리기만 한다면 철커덩 거리는 진동음은 더이상 경쾌함이 아니라 소음이 될 것이고 엉덩이 밑으로 스프링이 그대로 느껴지는 의자가 주는 불편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갈 것이다. 그렇지만 기차 여행에는 정차라는 것이 있다. 가만히 멈춰 서 있을 때, 내리는 사람들과 새롭게 타는 사람들을 볼 수 있고, 시간이 되면 잠시 내려서 열차 우동도 사먹는 그런 시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차는 또한 우리가 자동차 운전을 하고 가다가 마음만 먹으면 갓길에 세워놓고 쉴 수 있는 그런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수동적인 이벤트이다. 기차가 서면 서는 것이고 출발하면 달리는 것이다. 목적지만 바라보며 빠른 시간에 도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정차는 치명적이다. 조급함이 더 올라올 것이고 급기야 짜증과 혈기가 올라올 수 있는 그런 시간일테니...하지만 정차라는 것이 기차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사람은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잠시 내려 자판대 앞에서 과자를 사달라며 엄마 손을 붙잡고 조르는 아이를 보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서 한동안 바쁜 일상에 밀려 잊고 있던 부모님을 회상할 수도 있고, 서류 가방을 들고 바쁘게 뛰어가는 젊은 남자를 본다면 일에 대한 열정으로 힘든 것도 잊고 달려가던 자신의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차앞에 놓여있는 아직은 달리지 않은 길과 그 길의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주변의 멋진 경관을 보며 새로운 설레임과 기대감 또한 회복할 수 있다. 


어쩌면 이 기차 여행이 우리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정차해서 멈춰서야 할 때도 있고, 위험한 산 위를 달릴 때는 속도를 늦춰야만 할 때도 있고,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기차는 정확히 선로위를 달릴 것이고, 우리가 티켓을 손에 쥐고 있는 한 우리의 목적지에 분명히 도달할 수 있다. 티켓에 써있는 목적지를 보면 '아..내가 이곳에 가고 있는거지.'라며 자신의 목적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도 있다. 단지 우리는 기차의 여정에 자신을 맡기고, 긴장을 풀고 앉아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고, 회복또한 경험할 수 있다. 


힘들때면 한 번씩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 나는 지금 기차를 타고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물과 불 속을 달리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원하는대로 빨리 지나갈 수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틀수도 없지만, 우리가 그대로 내어 맡기고 그 물과 불을 지나가다 보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티켓을 손에 쥐고 놓지 않기만 하면...어느 순간 기차의 뒷칸에 실어 놓았던 우리의 짐들은 다 타서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장만해 주신 새로운 짐들 (이전의 짐 가방보다 훨씬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로 채워져 있음을, 그리고 기차는 더이상 덜커덩 거리며 거북이 걸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듯 초고속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과 그 희망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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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직업에도 불세례를 받으십시오
장봉운 목사님


구약성경 『출애굽기』는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구원과정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매우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반면에 구약성경은 서술적이고 역사적입니다.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철학적인 주제들에 관한 의미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신약시대를 사는 영적 과정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에서 찾아내야 할 영적 의미에 관한 요령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구원에 관한 증거로 세례가 있습니다(벧전 3:21). 구약시대에는 할례가 이스라엘인이 된 증거이며, 그것이 구원 받은 백성의 증표이기도 했습니다. 할례의 논쟁은 초대 교회에서 뜨거운 쟁점이었던 것은 구원의 증표로 계속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할례는 구약의 증표이며, 신약의 증표는 세례라는 사실을 교회가 공인함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식이 되었습니다. 이런 세례가 물 뿐만 아니라 불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세례는 동시 또는 간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의 세례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불세례는 성령 안에서 주의 백성이 되어 성령의 도구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치는 증거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거듭남의 증거로서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례 가운데 우리가 이제까지 소홀히 여긴 부분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은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통과하는 일련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인인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의인이 되어 이 땅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이 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물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신약성경은 세례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 10:1~2). 그런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몸만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 소유 모두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가축은 물론 각종 살림살이들을 다 가지고 탈출했고 그것들 모두를 가지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전 소유는 구름 아래 놓여있었으며, 물을 통과했습니다. 이로써 세례란 우리 몸뿐만 아니라 소유 전부에 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축이란 그 당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습니다. 히브리인인 이스라엘은 농경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목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축은 생계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갈 근거가 되는 집과 옷가지들도 모두 구름 아래 그리고 바다를 통과했습니다.

소유를 이집트에 두고 나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새로운 것을 장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닌 과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물을 통과했습니다. 이는 우리들의 세례가 전혀 색다른 조건과 배경에 들어간 후에 받는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과 화해하는 증거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 시기의 우리 몸은 여전히 죄인이며, 우리 소유 전체가 여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지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 몸과 소유 전체에 대한 세례는 우리 것 전부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몸만이 구원되었고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 전체에 대한 세례의 의식이 아직은 확립되지 못한 것입니다. 소유에 대한 세례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생계 수단인 가축의 세례는 오늘날 우리들이 생계 수단인 직업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부분이 세례를 받아 주님의 것으로 인정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재물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며, 그 소유 전체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와 주장을 포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례는 물과 불의 이원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물은 정결하게 하는 것이며, 불은 태워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이 두 가지 세례 과정을 통해서 전혀 다른 신분이 되었듯이 우리 소유와 직업 역시 이 두 가지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침묵적이고 내면적이라면 불세례는 역동적이고 외면적입니다. 물세례는 보이지 않지만 불세례는 가시적인 증상을 동반합니다. 이 두 가지를 통과함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듯이 우리의 소유와 직업이 이 두 가지 과정을 통과할 때 진정으로 주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다수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물세례는 받았지만 불세례는 받지 못한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세례의 대표적인 증상이 방언이며, 뜨거운 불이 내리는 기름부음의 체험을 가지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며, 세계관의 변화 등이 일어납니다. 누가 보아도 불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그 변화가 가시적이며, 급변적입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외형적 증거를 동반하기 때문에 눈으로 그 사실을 대부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둔감한 사람은 불세례를 미약하게 경험할 때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불세례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소유와 직업에 대해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우리는 소명이라는 말로 대치해서 불러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물질에 대한 세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못한 것입니다. 소유와 직업이 물로 정결해지고 불로 태워져서 전혀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재산과 직업은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자에게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밭을 가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듯이(신 25:4, 딤전 5:18, 고전 9:9) 일군에게 그 삯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 각 사람이 이 땅에서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분깃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들꽃과 참새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증거하신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군으로서 일을 하게 될 때 더 많은 것들을 공급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소유와 직업이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과할 때 비로소 자신의 소유와 직업이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몸이 불로 세례를 받게 되면 능력을 덧입게 되어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되며, 직업이 세례를 받으면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재정지기로서의 직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가졌던 소유가 타버리며, 직업이 새로워집니다. 그 실질적 현상이 바로 사업이 갑자기 기울어 재산의 손실이 오며, 직업을 잃게 되어 실직자가 되는 쓰라린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이런 위험스럽고 고통스런 과정을 밟고 있다면 이것이 자신의 소유와 직업에 대한 물과 불의 세례라고 인식해야지 실패나 징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낙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과정을 통과하여 몸과 재물과 직업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주요한 일군인 재정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몸을 비롯해서 재산 전체에 대한 세례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함같이 우리들도 완전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마 5: 48). 아직도 직업과 소유에 대한 불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전 존재가 세례를 받을 수 있기를 사모하십시오. 몸만 세례를 받고 재물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이는 마치 자기 재산 전부를 이집트에 두고 몸만 빠져 나온 것과 같습니다.

재산에 대한 불세례를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에 관해서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사 33:14)라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시온의 죄인들과 경건치 못한 자들이란 아직 불로 세례를 받지 못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과 성령의 인도를 제대로 인식할 줄 모르는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 시험이나 불세례를 받게 될 때 이렇게 믿음 없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사야는 참으로 용기를 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었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 33:21~24)

우리는 돛대 줄이 풀렸는지, 돛대 밑이 튼튼한지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무작정 항해를 나선 어리석은 뱃사람처럼 그렇게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니지는 않았습니까? 영의 일이 어떤 것인지,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 영적 주체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임하고 작용하는지, 도무지 알지도 못하면서 육신이 끄는 대로 그렇게 주의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전부로 알았습니다. 주님은 “때가 되면”이라고 그 시기에 대해서 언급하시고 계십니다. 불 시험 또는 불세례를 통과하는 그 시기가 이르게 되면 우리가 비록 저는 자처럼 무능할지라도 재물을 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 보장되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 관해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사람들은 너희를 '주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 라고 일컬을 것이다. 열방의 재물이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마음껏 쓸 것이고, 그들의 부귀영화가 바로 너의 것임을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사 61:6) 이 말씀이 우리 세대를 위해서 간직해두신 말씀일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될 때가 바로 세상의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며, 마음껏 쓸 수 있게 되는 시기일 것입니다. 이런 시대가 우리에게 당하게 하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들이 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깨우고 자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 강력한 재정지기들을 세우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역할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이런 재정지기는 소유와 직업이 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 자격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믿음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시온의 죄인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런 불을 통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불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두려워할 것입니다. 직업을 잃고 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아서 파산하게 되기도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불세례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이 더 이상 말로만 다루어지지 않고 실제로 그 역할을 성도들이 할 수 있는 환경이 교회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중 사역이 회복되고 여러분들이 각각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직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며, 주어진 그 역할을 제대로 적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교회 구조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여러분은 ‘주님의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응답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주님의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열방의 재물이 우리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재물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열방의 재물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을 때에 그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각 사람이 스스로 성령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임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회가 제도적으로 만들어놓고 누구나 적당히 그 자리를 메우는 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제사장이 되는 길을 막는 방해가 될 뿐입니다.

여러분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몽학선생과 같고 율법과 같은 제도는 이제 성숙해진 후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장애물과 같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부귀영화가 우리의 것임을 자랑하게 되는 시대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을 품고 영의 일을 사모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영성훈련은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것이 재물의 축복을 얻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2011년 10월 19일 수요일

지금 내 안의 성전에는 누가 중심에 있는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시 122:6-9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소제목이 붙어있는 말씀이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사람들의 말에 기쁨으로 나서는 다윗은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전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를 축복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예루살렘을 축복하고, 형제들과 친구들을 위해 평강을 구하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번영을 구하는 시를 묵상하면서 예루살렘은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이기에 그곳으로 가는 것이 기쁨이요, 그곳이 축복을 받길 원하고 또한 번영하길 원한다는 말씀이 참 도전이 되었다. 그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하고 있을때만이 이런 고백과 간구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리는 기도하며 축복을 구한다. 성공을 구하고, 번영을 구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전히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못하고 나의 의를 의지하며 나의 높아짐을 구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함으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오셨기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이기에, 이제는 우리 자신이 예루살렘이다. 우리의 몸이 바로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축복하고, 자신의 번영을 구하는데 있어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크리스찬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또한 고백하지만 우리를 위한 우리 자신의 기도는 여전히 세상적인 경우가 많다. 우리 안에 성전이 있기에, 그 거룩한 예수님을 품고 사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축복이 있어야 하고 또한 번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채,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축복과 번영이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기복신앙적인 간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싶다. 같은 축복과 번영을 구하는 것이지만 그 동기를 살펴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주님을 만나고 부터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내 입에서 나왔던 기도는 '주여,어느 때까지이니까' 였다. 성경을 보면, 특히 시편에 참 많이 등장하는 말이기에 힘들다는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내뱉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과연 무슨 기도를 한 것이었나 싶다. 내가 그 기도를 할 때 나의 중심은 나를 향하고 있었던 경우가 많다. 크리스찬이기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바탕은 있었겠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분명 나의 욕심과 바램이었지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들어가 있지를 않았다. 하지만 다윗은 어떠했는가? '주여, 어느 때까지이니까'라고 간구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자신의 힘듦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려움을 통해 '너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조롱하는 대적들로 인한 더 큰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골리앗에게 분개하며 물맷돌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전장에 나섰던 그 다윗의 마음이 그 고백에 묻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눈으로 상황을 보는 그런 다윗의 마음보다는 나의 기준과 의로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컸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존재기에, 지존하신 그 분이 자녀로 불러주셨기에 나의 자존감이 높아지고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도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기에 내 몸이 성전이되고, 그렇기에 나를 더욱 사랑해야 하는 것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라 생각된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고, 또한 번영을 구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살펴 과연 그 곳이 성전인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모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온데간데 없고 그 성전 안에 나 자신이 들어가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과 번영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사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다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내가 낮은 자존감과 낙담과 낙심의 공격에 더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축복하고, 나의 번영을 더욱 크게 구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내가 성전이 되었기에...내 안에 지존하신 그 분을 모시고 있기에...나 때문이 아니라 그 분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한 나 자신을 잘 살피는 것 또한 게을리 하지 말아야 겠다.

과연 지금 내 안의 성전에는 누가 중심에 있는가?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치유의 길

유전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씩 특이한 편두통으로 인해 고통받곤 한다. 유전적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우리 어머니도 비슷한 증상으로 고생하시기 때문인데 신경과 의사인 매형조차 그저 참 보기 드문 현상이라며 딱히 뚜렷한 치료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리 흔한 증상은 아닌 것 같다. 흔한 것이든 아니든, 문제는 일단 이게 시작되면 너무 힘이 든다는 것. 위치는 매번 조금씩 달라지지만 시작되면 마치 긴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통증이 반복된다. 콕 찌르고는 잠시 괜찮다가 또 콕 찌르는 통증...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찌르는 그 양상이 랜덤하고 지속적이어서 더 힘들게 되고 또한 짜증도 나고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했었던 그 증상이 다시 지난주 화요일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리 심하지 않던 증상이었고, 목요일에는 에릭 홀저펄 목사님 치유 집회에도 가보고 하면서 금요일에는 실제로 통증이 거의 없어서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약을 통해서 나았다기 보다는 그저 기도받고 또한 기도로 대적하고 선포하면서 나았다는 생각에 '아~ 하나님이 고쳐주셨구나. 나도 이렇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하는구나' 하면서 기뻐했었는데 토요일 저녁때부터 그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도 전보다 더 심하게. 밤에도 잠을 못이루고 새벽내내 머리를 부여잡고 기도하면서 계속 물었다.
'믿음으로 선포하며 기도했는데, 참된 치유자이신 하나님께서 치유하여 주실 것을 믿음으로 선포했고 또한 나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였는데 왜 또 아픈 건가요?'
생각해보면 약에만 의지하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면서 나을 것으로 믿고 행동하는 나 자신의 모습도 참 많이 달라진 것이고 또한 그렇게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심한 통증으로 시달림을 받던 그 시기에는 그저 '왜 낫지 않을까? 왜 또 시작되었을까?'라는 문제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때 까지도 약기운 때문인지 통증은 조금 덜해지긴 했지만 투통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침 Wesley and Stacey Campbell 부부가 HRock Church에서 주일 예배 설교를 한다는 소식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통증에 시달리고는 있었지만...^^) 교회로 향했다. 늘 HRock Church의 찬양시간에는 기름부으심이 많이 임하는 걸 느끼지만 이번 찬양 시간에 찬양을 하는동안에는 특히 더 많은 기름부으심을 느낄 수 있었다. 크게 찬양하면서 어느덧 나도 모르게 통증을 잊을 수 있었고 더구나 찬양 후 Che & Sue Ahn 목사님 부부의 치유 기도도 있어서였는지 찬양 시간 이후 부터는 통증이 거의 없어졌다. 할렐루야~!!!

아픈 것이 나은 것은 좋은데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하나님의 치유란 어떤 것인지... 나 나름대로는 믿고 선포하며 치유함을 받으려고 구했는데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거기서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인지...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은 치유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언가를 해서 치유를 받으려는 노력을 했다. 안수를 받고, 기도로 대적하며 내어쫓는 등의 어떠한 행위를 통한 노력. 하지만 그것은 형식이고 방식이다. 우리가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 입국 심사를 받을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입국 검사관에게 우리의 여권을 보여주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여권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그 여권을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중요한 것인가? 두 손으로 여권을 들고 보여주던지, 웃으면서 보여주던지, 아니면 비장한 각오를 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보여주던지, 결국 우리는 모든 서류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다면 입국할 수 있게 되어있다. 보여주는 태도에 따라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공항 한 구석으로 끌려가 추가 질문을 받고, 더 자세한 검사를 받을수는 있지만 결국은 입국은 보장된 것이다. 즉, 입국을 위해서 여권을 보여주는 행위는 꼭 있어야 하지만 우선은 그 여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여권이란, 그 통행증을 발급받는 것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이해하고, 느끼고, 그것을 통해 그 크신 사랑을 더욱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편두통이 왜 나았다고 생각하느냐?'
주일 예배에서 강한 기름부으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가운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동안 나았다고 대답하는 나에게 다시 물으신다.
'그러면 왜 찬양하였느냐?'
'God is good!! 이잖아요. 주님의 그 사랑과 권능과 존재 자체로 인해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양했죠.'
하나님은 다시 물으심으로 나에게 도전을 주신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위 아이돌이라 하는 스타들을 팬들이 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냐? 팬들도 가수를 사랑하고 열정으로 섬기느니라.'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은 십대 청소년들이 이 시대의 아이돌이라고 하는 가수와 탤런트들에게 열광하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아이돌과 팬들 사이의 관계는 결국 겉모습 뿐인 관계이다. 자신의 팬이라는 이유로 어떤 스타가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사랑하는 것은 보기 힘들다. 알맹이가 없는 겉모습. 자신의 팬들을 사랑한다고 하고, 나는 그 스타의 팬이기에 그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관계는 외적인 것에 근간을 둔, 껍데기만 있는, 결국 허무함만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누군가의 팬이 되어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고, 재능을 사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 잘 누리기 위해서라도 문화를 누리고 여가 활동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보는 스타와 팬의 관계를 그대로 적용해서는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채찍 맞음의 더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없는 선포는 힘이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여권 발급하듯 그 통행증만 배부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가신 것이 아니다. 어떤 능력 행함의, 기적을 보이는 공식과 룰만을 보여주고 가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대적할 때 과연 우리는 그 참된 의미를 기억하며, 그 진정한 힘과 사랑을 느끼며 믿음으로 선포하며 기도하는가? 그저 성경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했기에 그저 수학 공식에 숫자를 대입하듯 형식을 맞춰서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주의 보혈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영권/권능은 예수님의 그 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결코 약할 수 없다. 무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그 십자가를 묵상하며,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더 깊이, 어제보다 오늘 더 깊이, 깨달아가고 누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십자가 보혈의 참된 의미가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고, 자신감의 보증 수표이고, 승리하는 삶으로 이끄는 통행증이 될 것이다.

2011년 10월 3일 월요일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니
마 6:33

크리스찬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면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와 많이 마주치게 되었다. 도대체 성경에서 그렇게 강조되고 있는 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시편 62편을 보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시 62:11-12

One thing God has spoken, two things have I heard: that you, O God, are strong, and that you, O Lord, are loving. Surely you will reward each person according to what he has done.
Psalms 62:11-12

처음보고 이해가 잘 안된다 싶어 영문 구절을 보았더니 한역본과 완전 다른 말이었다...ㅋㅋㅋ 영문 구절을 보면 결국 하나님은 한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나는 두 가지를 들었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강하시고, 주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처음 묵상할 때 내가 받은 것은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심과 동시에 사랑이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주로 한면만 바라보고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가는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강한 능력의 하나님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고, 사랑을 공급받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만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으신다고 한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만 원하는가?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만 원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두가지 모습을 다 구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늘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balance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만 구해서도 안되고, 그분의 능력만 구해서도 온전히 그 분과 동행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묵상을 한 후 며칠 후 하나님은 이 구절의 또다른 의미를 변승우 목사님의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책을 읽는동안 깨닫게 하셨다. 'God is strong'이라는 것은 능력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것. 거룩하신 그 분은 그 속성상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렇기에 죄에 대해서는 회개함을 통하지 않고서는 늘 강하게 그 죄를 물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인 것이다. Strong한 하나님은 분명 이 죄에 대해 강력하게 대치되는 (strongly against sin) 모습을 그 능력과 함께 보이고 계신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의는 하나님의 분명한 속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그 분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삶이기도 했다. 그 분의 삶은 사랑의 삶이었고, 하늘의 의를 행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기다리던 메시아에게 감히 세례를 드릴 수 없다고 주저하던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더 잘 나타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5

결국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이땅에 드러내고 가르치기 위한 길을 걸어가셨던 것이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 땅에 전하며 살아야 하기에 우리의 삶은 의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통로가 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Righteousness goes before him and prepares the way for his steps
시 85:13
위의 시편 말씀처럼 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수 있다. 의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욱 강하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삶에, 가정에, 사역에, 직장에서 의를 드러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밖혀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지만 그 죄사함은 거저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의 그 죄사함이 우리의 삶에 역사하실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친 것이고 베드로 역시 회개한 후 예수님께 세례를 받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라 한 것이다. 회개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을 정결케 하고 의가 우리의 삶에서 묻어나오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욱 강권적으로 역사하시고 변화시키실 수 있도록 예비하는 것이 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의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열쇠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확장시키는 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그들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을 먼저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무언가 세상적인 도덕적 기준에서 바르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면 '크리스찬이라는 사람이 뭐 저런가? 저런 모습이 크리스찬이라면 나는 별로 되고싶지 않다'라고 말하게 되곤 한다. 어쩌면 가장 큰 전도의 툴은 우리의 삶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면 당연히 우리는 세상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해도 선행을 베푸는 사람, 구제를 행하는 사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은 분명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또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렇듯 우리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그 하늘의 의가 세상에 드러날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업적이나 부나 명예를 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통해 세상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하고 또한 궁극적으로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말씀처럼 우리가 의를 통해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이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는 천국으로 가는 조건이자 세계를 심판하시는 기준이기도 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 20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 96:13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었는가? 행함이 없고 올바른 가르침이 없는 의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의를 구함과 동시에 행함으로 나타내야 하고 또한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보실 우리의 세계를 의로 채우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고 또한 듣는다. 이 팔복에 의와 관련된 항목이 두 번 나온다는 것 또한 주목할만한 사실인 것 같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 6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 10

6절은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의의 필요성이다. 우리는 의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영적인 삶이 채워져야 한다. 또한 10절의 의는 세상으로 의를 드러내는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로 채움과 동시에 세상에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함을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는 또한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서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 6:14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고 영적 전쟁에 나서야 한다. 흉배란 무엇인가? 우리의 내면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던가? 의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보호하며 지켜야 한다. 말로, 상황으로, 낙담으로, 좌절로, 인간 관계 등등...끊임없이 우리를 어둠으로 몰아가려 하는 악한 영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 가슴에 품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먼저 구해야 한다. 신앙 생활은 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분을 알아가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묵상하고 또한 간구함으로 그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 위에서 여러번 언급한 것과 같이 의는 우리 자신의 삶을 세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으로 드러내야 할 항목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함을 보여야 한다. 사실 행함이 없는 신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 아니던가? 야고보서 2장에서는 이 행함에 대해 강조되고 있다.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확신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인해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이렇게 키운 의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날마다 낙심과 좌절과 혼미함과 싸워야 하고, 저의 내면의 짜증과 혈기와 싸워야 하는 저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 자신의 죄인됨을 더 잘 아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제 안의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빛이 장악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의의 빛이 저를 통해 세상을 비춤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주시옵소서. 또한 그 의를 드러낼 수 있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도 주시옵소서. 의의 길에는 핍박이 있을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제가 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나의 틀 안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박사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서도 같은 실험실에서 비슷한 일을 하다보니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여기서 얼마나 있을 것인지, 이곳을 떠나면서 바로 지원을 해서 직장을 얻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또다시 포닥 생활을 할 것인지 등등...그럴때면 늘 대답하게 되는 것이 이곳에서 포닥을 단기간만 하고 좋은 결과가 나와서 나의 객관적인 스펙이 좋아지면 바로 지원해서 아카데미아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런 대답을 하면서 나의 생각속에 치고 들어오는 생각은 나의 박사과정 동안의 일은 소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포닥기간 동안 좋은 결과로 저명한 저널에 논문을 써야 어딘가에서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 나는 박사 과정 동안 좋은 논문을 못 썼기 때문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아니 거의 실패에 가깝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은 다분히 세상적이고, 이성에 기반을 둔, 나의 한계 속에서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지금은 아직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 노력해서 더 나은 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물론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자기를 개발하고, 또한 계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다음 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또는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된다면 그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주님께 비전을 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세상적인 기준과 자신의 생각으로 지금의 내가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려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런 태도에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는 비전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당당히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전 선교동원가로 섬기고 계신 오석환 목사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도전이 되고, 기억에 남는 말씀 중의 하나가 "Father, if it is your will, then it is your bill!" 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그런 당당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크리스찬이라고 말하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라고,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우리가 정의내린 한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여전히 우리의 사고가 세상적인 틀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소개할때 어떤 식으로 소개하는가?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손기철 장로님을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나 자신도 손 장로님을 온누리 교회 장로님이시고, 교수님이지만 치유 사역을 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쓰니 마치 내가 손 장로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같이 보이는군.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른다...ㅋㅋ). 하지만 하나님이 손기철 장로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그 분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틀 속에서 바라보실까? 내 개인적인 짧은 소견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는 성령의 열매가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그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지...그는 온유하고 절제가 있는 사람이지...그는 기쁨이 넘치고 나눌줄 아는 사람이지...등등. 물론 더 많은 덕목들이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우리가 정의를 내리는 틀과 하나님께서 정의를 내리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렇기에 많은 경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사고와 이성의 틀 속에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서라고 하시면 서는 삶이 크리스찬의 삶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데 '아버지, 잠시만요.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그 길을 가려면 A도 준비해야 하고, B도 준비해야 하고, C도 적어도 이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 삶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얼마나 답답한 삶일까? '주님! 주님이 가라고 하시기에 갑니다! 제가 부족한 것은 주님이 아시니 채워주시고 예비해 주세요!'라는 삶이 진정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삶일 것이다.

나의 사고의 틀이, 정의를 내리는 기준이 바뀌길 바란다.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 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고 사는 삶. 나의 객관적인 사실로서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써 내가 드러나는 삶이 되길 원한다. 무슨 학교를 나오고 박사를 받았고 안 받았고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 사랑이 넘치는 사람, 온유한 사람, 하늘의 지혜를 전하는 사람, 나눌줄 아는 사람, 오로지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사람 등등...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정의가 되는 내가 되기를 구해야 겠다.





2011년 9월 29일 목요일

찬양과 경배의 삶

요즈음 밤에 승혁이를 재울때면 이런 저런 기도를 많이 해주려고 한다. 주로 대적기도와 축복기도를 해주면서 재우는데 비몽사몽간의 상태에서 깊이 잠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에 일단 잠들기 시작할때까지 기도해주고 그 후에는 잠시 나혼자 기도를 하며 기다리곤 한다.
며칠 전에도 같은 패턴으로 기도해주면서 재우다가 슬슬 잠이 드는 것 같길래 다른 기도를 시작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찬양할때는 온전히 주님을 높여드리며 경배를 드리는게 상대적으로 쉽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 혹은 홀로 기도할 때는 형식적으로 내뱉게 되는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 말고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감사드리는게 너무 없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래서 그냥 다른 것 생각치 않고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 하고 있었는데 5분이 조금 지났을까 하는 시간부터 갑자기 알 수 없는 기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얼굴은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내 심령속에 평온한 기쁨이 밀려오는 것이, 세상이 주는 그런 기쁨과는 분명히 다른 기쁨이요 행복이었다.

그 기쁨과 행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왜 나의 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만으로도 그렇게 기뻐했을까?

문득 우리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학교에서의 기도 모임에서도 다른 친구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다 세상적인 비전에 대한 것이었다. 일과 개인적인 삶 (가정)의 balance, 지금 나의 자리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것 등등. 하지만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삶의 목적이나 또는 하나님 안에서의 비전의 문제들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지 않을까? 내가 요즘 생각하는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함으로 높여드리는 것,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 이렇게 크게 두가지이다.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 (building up relationship with God)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두가지는 그 관계가 형성되면 당연한 나타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선 잘 알아야 한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의 육체적 / 정신적 상태는 어떠한지 등등...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지금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바람직한 관계는 어느 한 사람만 잘 알아서 공급해 주는 일방향성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양뱡향성의 관계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설사 많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얼마나 더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예수님은 어떠한 눈에 보이는 행위로 (심지어 그것이 주님을 부르며,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라 해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음을 확실히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함으로 인함 보다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나님과의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할 때, 우리가 다른 어떠한 것보다 하나님께 더 관심이 있음을 보일 때 우리를 더 기쁘게 받아주신다. 분주하게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움직이던 마르다를 뒤로하고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에게 그러하셨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에게 그러하셨다. 과연 그들의 그당시 마음 상태는 무엇이었을까? 오로지 지금 눈앞에 계신 예수님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다른 어떠한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가 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나아가다 보면 그 분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삶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인 동시에 그런 하나님을 더 알리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한 삶이 되지 않을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삶이어야 한다. 단지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두 팔 벌려 찬양할 때만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매순간 그분을 생각하며,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고민하는 것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삶이기에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기도를 드릴 때 나의 영이 그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흔히들 놓치게 되는 것이, 무엇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 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찬양과 경배는 못하겠네요. 나중에 제가 상태가 좋아지고 주님께서 크나큰 기도 응답과 축복을 주셨을 때 감사드리고, 찬양하고, 경배할께요.'라고 고백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말 그대로 우리의 주님이기에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때 오히려 우리에게 기쁨이 생기고 영적인 힘으로 채워질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여러가지 일들로 분주해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는가?
고민이 너무 많아서, 정신적으로 지치고 힘들어서 그저 쉬고만 싶고 영적인 생활은 잠시 접어두고 싶은가?
육체적인 피로로 인해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자고싶고, 쉬고싶은 생각 뿐인가?
그렇다면 그 순간이 다른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 다른 어떠한 해야 할 일들도 내려놓고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그분께 사랑을 고백할 시간일 것이다.
그런 고백의 시간을 통해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면 우리의 영이 기뻐 춤추고, 영적 돌파를 일으킬 수 있는 힘도 회복될 것이니 말이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높여드립니다!"

2011년 9월 20일 화요일

눈물이 있는가?

나의 삶에 있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종종 찾아오는 낙심과 낮은 자존감의 공격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 삶에서 아무런 기쁨도 열정도 찾기 힘든 날들이 가끔씩 나를 주저앉히곤 한다. 대부분 경제적인 부담이 느껴질 때, 일에 있어서 너무나도 오랫동안 진전을 보지 못하고 실패가 계속 될 때, 가장으로서 우리 가족들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함을 느낄 때,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과 또한 휴식의 시간이 없음으로 인해 극한의 피로를 느낄 때 이런 무기력의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 것 같은데 일단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마음 상태에 들어서게 되면 헤어나오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나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들이 힘든 상태에서 바닥을 한 번 치고서야 겨우 조금씩 회복이 되곤 한다. 며칠 전에도 이런 상태가 찾아와서 힘들어 하고 있었는데 문득 바울의 고백이 떠올랐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바울은 어떻게 해서 모든 상황에서 만족하고 자족할 수 있었을까?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했을때 주신 감동이 바로 '그는 많이 울었다...'라는 것이었다.

울었다고? 나에게 있어 바울의 이미지는 강인함과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의지와 열정이 있었고 진리를 설득력있게 말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었기에 강하고 이성적인 이미지가 일종의 선입견으로 내게 들어와 있었나보다. 그렇기에 그가 많이 울었다는 말은 선뜻 와 닿지가 않았고 나의 영적 상태도 그리 좋진 않았기에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 맞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래도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선 눈물을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것은 겸손함과 진실함이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약하게 보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에 눈물을 보이지 못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 암시를 걸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더강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서는 진실함이 묻어나올 수가 없다. 어쩌면 나도 이런 부류에 속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동안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성실함과 열심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눈물을 흘리는 적은 거의 없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랩 친구들과 칼텍과 우리 지도 교수, 그리고 랩을 위해 기도할 때 눈물이 핑 돌고, 하나님의 감동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이 적셔지는 걸 경험하면서 나 스스로도 내가 많이 변하고 있구나를 느끼곤 한다. 결국 눈물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스스로 낮아짐을 경험하면서, 회개할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흘릴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진실함이 없이는 눈물도 있을 수 없다. 너무나도 가슴 벅찬 기쁨이 있거나 심령이 무너지는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진실함이 없이는 눈물도 흘릴 수 없거늘 타인에 대해서는 또한 어떻겠는가? 연기에 능숙한 연기자라 할 지라도 그 배역의 감정과 일치되지 못하면 실감나는 눈물의 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는 겸손함을 갖추었고 또한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기에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그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 극한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니 눈물 없이는 살 수 없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눈물은 또한 우리가 진실로 회개할 때 흐르게 된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한 분이시기에 그 분의 강력한 임재가 있을 때 우리는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많은 간증이 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그렇기에 우리가 날마다 그 분 앞으로 나아가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을 보고, 또한 그런 죄 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저절로 눈물이 나지 않을까?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다. 날마다 자신을 내려놓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 전도의 길을 가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 앞에서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며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런 눈물이 있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고 그 복음의 길을 순종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눈물은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는 모습을 볼 때 눈물을 흘린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울지 못한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그를 다시 살리기 전 눈물을 흘리셨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슬퍼하는 마리아와 다른 유대인들의 눈물을 보며 그들의 그 슬픔을 보며, 그들의 아픔을 느끼며 함께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것은 나사로를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눈물이었다. 이렇듯 눈물은 또한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3-35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보며 예수님은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실까? 그 눈물을 알기에, 그 사랑을 느끼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후,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달려가는 것일 것이다. 바울도 그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기에 아마도 많은 사랑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눈물은 감동의 표현이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충분히 감성적이기만 하다면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서 또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는 바로 구원이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 또한 그 사랑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전 통일부 장관인 김하중 장로님의 삶을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순간마다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눈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던 때이기에 그런 내 모습에 나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목도 하는 것은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 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기에 충분한, 크나 큰 감동이다.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수도 없이 몸으로 체험한 바울은 그 큰 감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겠는가? 그렇기에 그의 삶은 눈물의 삶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 자신의 생각이기에 사실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생각들을 통해 나의 신앙 생활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낙심과 좌절이 왜 찾아오는가? 왜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되는가? 주님께서 늘 내 곁에 계시고 그 분이 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에 그 믿음이 있다면 더이상 낙심도 무기력도 있을 수 없다. 낙심과 좌절과 무기력은 바로 그 순간 내가 내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나만의 세계에 단절되어 살고 있다는 적신호와 같다. 많은 내적치유 세미나나 설교에 등장하는 치유 경험은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그 순간 옆에서 함께 울고 계셨던 예수님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 예수님이 그 내면 깊은 곳의 상처를 만지시면,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에 주님은 어디에 계셨나고 울부짖으며 원망한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만 눈을 돌려 그 상황에서 함께 울고 계신, 아니 자신보다 더 슬프게 울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랑과 감동에 압도되어 결코 치유될 것 같지 않던 그 상처들이 치유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보고 듣는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옆에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악한 영들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주님을 놓치게 한다. 며칠 전의 나도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과 힘든 여건이 내 삶을 이끌어 갔던 시간...

힘들때면 눈물의 의미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나에게 눈물이 있는가?
나에게 주님을 향한 겸손함과 진실됨이 있는가?
내가 나의 죄성을 깨달으며 회개하고 있는가?
내가 주님의 그 사랑을 느끼며, 또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은 주님의 그 크신 역사하심을 경험함으로 인한 감동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나는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웃고, 울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그 분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놓치고 있던 주님을 우리의 삶에 회복할 때 더이상 낙심도, 우울도, 낮은 자존감도, 걱정도 우리의 삶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도 자연스럽게 바울의 그 다음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족하며 사는 내 모습을 기대해 본다. 주님 저의 시야를 넓혀 주시옵소서. 제게 능력주시는 주님의 자신감으로 살게하여 주옵소서!!

2011년 9월 16일 금요일

물레방아의 영성

기도를 하다보면 가끔씩 하나님께서 단어 하나씩을 툭 던지시며 깨달음을 주실 때가 있다. 며칠 전 승혁이도 재우고, 우리 부부도 기도도 할 겸 온 가족이 다 함께 운전하고 동네를 돌며 기도를 했었다. 한참을 그렇게 돌며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 주신 생각이 '물레방아' 였다. 난데없이 떠오른 물레방아라는 단어에 의아해 하며 물어나가는 나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물레방아는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라고.

물레방아는 혼자서는 돌지 못한다. 힘차게 쏟아지는 물이 있어야 돌 수 있는 것이기에 결국은 끊임없는 물의 공급을 필요로 한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공급이 있어야 나의 영적인 삶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물레방아란 말인가? 무언가 공급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는 예는 수도없이 많지 않은가?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도 가지 못하고, 전기가 없으면 냉장고도 제 일을 할 수 없고, 하물며 우리도 밥을 먹지 못하면 기운이 없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데 왜 물레방아를 말씀 하신 걸까?
사실 요즈음은 물레방아가 그저 물이 흐르면 도는 장식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원래 용도는 곡식을 찧는 방아였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무엇을 찧고 있는 건가? 나의 자아와 오래된 구습들, 나의 기준, 선입견들을 빻아서 고운 가루고 만들고 있다는 음성을 듣고 나서야 무언가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언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면서 열심히 내 자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지난 30년 조금 남짓 나의 삶을 이끌어 왔던 나의 가치관의 주된 요소들을 파쇄하고 고운 가루로 만들어 가는 작업...그렇게 곱게 가루가 된 나의 구습들은 떡으로 쪄지면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게 될 것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이제는 내 삶의 옛 틀을 다 깨고 부수어서 주님께서 원하는 새로운 떡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한 기쁜 일인가? 주님은 그 떡을 먹으라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3-58
이 물레방아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계속 돌려야 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나의 자아는 계속 해서 고개를 들려 할 것이고, 세상의 기준들은 계속해서 내 삶 속에 찌꺼기처럼 끼어 들어갈 것이기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영적인 공급을 받아 열심히 찧고 가루를 내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참된 양식으로 만들어서 먹음으로 내 안에 주님께서 거하시게 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일 터이니 말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기도는 저축하듯 쌓아둘 수 있는 것이지만 믿음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어떤 권사님을 통해 내게 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을 구하는 작업이 아닐런지...

또한 주님은 그 떡을 떼어 나누라 하신다. 나 혼자 열심히 내 자아를 죽이고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떡을 나눠주며 함께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그것이 크리스찬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해야할 일이 아닌가 싶다.

물레방아의 영성...
조금은 엉뚱하지만 깊은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 오늘도 감사를 올려드린다.
할렐루야~!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다윗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

시편을 묵상하다보면 다윗의 시를 통해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절실함이 묻어나는 시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기뻐하셨던 것이 전혀 이상하지가 않고, 나 또한 큰 도전을 받게 된다.

오늘 너무나도 유명한 시편 23편을 읽고 있었는데 문득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여지껏 하나님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내용만 보아왔지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부분은 쏙 빼놓고 인지하고 있었나보다.

영문 성경으로 2-3절을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2He makes me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quiet waters, 3he restores my soul. He guides me in paths of righteousness for his name's sake.

결국 2절과 3절의 첫 부분이 한 문장인 것. 이 부분도 사실 참 마음에 와 닿았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상황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평강'이다. 넓게 펼쳐진 푸른 초장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그 옆에 있는 바위를 베게 삼아 누워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면 절로 '좋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인터넷도 없고, 핸드폰도 없으며, 제출해야 할 보고서도, 밀린 실험 걱정도 없이 그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누워있을 때의 마음은 얼마나 평안할런지...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 시키신다. 얼마 전에도 평강에 대해 생각했었지만 역시 평강은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주님 안에서 우리의 내면의 평강을 찾고 나서야 우리의 영이 회복되고 소생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하나님이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문득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다윗이 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 가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다. 예수님을 알고 영접한 후, 그 사랑을 경험하고 느낌으로써 생겨나는, 다른 영혼을 향한 긍휼함과 사랑이 복음을 위한 열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 아닐런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누리는, 세상적으로 높아지는 것, 또 그로인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인생의 동기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똑같은 과정이고 결과라 할 지라도 그 속에 숨어있는 동기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일은 하늘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될 것이다. 삶의 이유가 주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삶은 의로운 삶이 되어야 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고, 사랑이시니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를 포함한 너무나도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 섞여 살아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내 짐을 어깨에 지고, 내가 문제들을 풀어가려 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부담감은 더 커지고, 조급함이 몰려와 결국 지쳐서 쓰려지면서 다시 하나님을 붙잡게 된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나님 사랑한다고, 나의 자아를 죽여달라고 고백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그 고백이 전혀 반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잘 되면 교만이 올라오고, 자기가 삶의 주인이 되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살게 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부분은 참 중요하다. 그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니 말이다. 사실 다른 다윗의 시들을 보더라도 이러한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제가 부르짖으오니 응답하여주시고, 저의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옵소서'라고 외치고 있지만 최종 결론은 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내가 승리해야 하는 이유도 내가 잘 살고, 내가 높아지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조롱거리가 될까봐이고, 열방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보이기 위함이라는 결론이 너무나도 명백히 드러난다. 내 삶의 안위와 영광과 축복을 보장해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른 믿지 않는 이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부르짖는 삶. 그렇기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의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다윗의 삶이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이 아닐까 싶다.

주님!!!
저의 삶의 목적을 늘 올바르게 인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크리스찬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임을 늘 잊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저의 자아를 죽이고 예수님께 주인자리를 내어 드리는 성령 충만함을 더더욱 구합니다. 주님! 깨어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봄 비의 영성

강력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더 강한 기름 부으심과 더 강한 능력의 나타남에만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난 일 년 조금 못되는 시간 동안의 경험은 나의 신앙 생활에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곳을 통해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점차 느끼게 되면서 집중하게 된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었다.

사랑이 있는가?
찬양에, 기도에, 설교에, 개인 사역에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면서 나를 돌아 보았을 때, 어느덧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 강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더 강한 영권과, 더 강한 기적의 역사만을 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이 있는가?
내가 정말 찬양할때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을 통해 내 심령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높여드리고,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다시 올려드리고 있었는가?
내가 부르짖으며 기도할때 나는 과연 그 분의 사랑을 구하고 있었는가? 그저 악한 영들의 영향력을 대적할 수 있는 더 큰 권능과 눈에 보이는 은사만을 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설교 말씀을 통해 나는 무엇을 공급받으려 하고 있었던가? 우리의 삶의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되는 주님의 사랑을 말씀 속에서 발견하려고 했던가?
영안 사역을 하는 나의 마음 가짐은 무엇이었던가? 그 영혼을 사랑하고 그 내면의 상처를 주님의 사랑을 통해 치유하고픈 그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가? 주님의 사랑을 그 심령에 심어주고, 그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는 그 절실한 마음이 있었던가?

나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면서도 여전히 강력한 기름 부으심을 구하며 기도하던 나에게 어느날 주님이 주신 감동이 있었다.

"너는 강력한 기름 부음을 구하고 있지만, 봄 비와 같은 기름 부음이 더 좋은걸 아니? 난 봄 비와 같은 기름 부음이 좋단다."

봄 비??
어느덧 캘리포니아에서 살아온 시간이 7년째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잊어가고 있던 한국에서 맞던 그 봄 비를 잠깐 떠올려 보았다.
마치 안개와 같이 흩뿌리며 날리는, 그런 비.
우산을 써야할 지 말아야 할 지, 때로는 이게 비가 오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내리는 그런 흩날리는 비.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르겠기에 우산을 펴기 쑥쓰러워 그냥 걸어나가게 하는 그런 비.
하지만 그런 빗속을 걷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옷이 젖어있음을 문득 깨닫게 하는 비.

아마도 주님은 그런 기름 부으심을 말씀하신 것 같다.

너무나도 그 임재가 강력해서 온 몸이 떨리고 감격의 눈물이 나는 그런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는 것도 분명 우리의 신앙 생활에 유익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강력한 역사하심을 통해 회개하고 신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그 경험이 너무나도 강력한 나머지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한 것이라는 것을 잊는다면, 그래서 매번 그런 강렬한 현상만을 쫓게 된다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크게 느끼진 못할지라도, 내 옆에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구하며 친구와 대화하듯 그렇게 대화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분명 어느 순간 나의 영적인 옷이 흠뻑 젖어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령 충만의 열매들이 우리 삶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이런 봄비와 같은 성령 충만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경험할 때가 아닐까?

무소부재하신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찾기만 하면 항상 우리에게 찾아오실 수 있다. 우리가 할 것은 단지 믿음으로, 항상 주님을 부르며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런 삶이 우리의 일상이 될 때 우리는 너무 무겁지도 또 가볍지도, 않은 하지만 충만하게 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쁨으로 따르게 될 것이다.

주님, 오늘도 봄 비와 같이 저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2011년 9월 14일 수요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1-13

자아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죄인임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 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주님과의 참된 교제도, 기쁨도, 감사함도 누릴 수가 없다.

나의 능력은 모자라지만, 나는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나의 지혜와 사랑은 감당치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계시기에, 그 분이 내 옆에 계시기에, 그 분을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겸손의 자신감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어야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힘을 내야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2011년 9월 9일 금요일

평강이 있느냐?

최근 여러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이 연이어 터져나오는 가운데 계속해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 아직 뚜렷한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고 가야할 길이 활짝 열린 것도 아니기에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느껴지는 조용한 음성...

"평강이 있느냐?"

무언가 뚜렷한 길을 제시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왠 뚱단지 같은 평강?'하는 생각으로 무시하고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또다시 감동이 느껴졌다.

"평강이 있느냐?"

내 생각이 아닌, 너무나 또렷한 생각에 내가 오히려 반문을 했다.

"주님, 지금 이렇게 많은 상황들이 앞에 있고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답답한 마음이 있는데 어찌 평강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또 들려오는 음성...

"평강이 있느냐?"

"그러니까 어떻게 지금 평강이 있을 수 있겠냐구요?"

"그러면 언제 평강이 있느냐?"

"......음......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성령 충만할때 평강이 있겠지요."

이 대답 후 마지막으로 물으시는 또 한 마디.

"평강이 있느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우리는 늘 문제를 대면하고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결정을 내려야 할 수많은 선택의 문제들이 있고, 직장에서의 문제, 진로에 대한 문제, 가족과의 관계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신앙의 문제들 등등 인생은 풀어가야 할 문제들 투성이인 여정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주님은 물으신다.

"평강이 있느냐?"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처럼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내 안의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평강이 없을 이유가 없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 16:8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해 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쫓기는 마음이 들 일도 없다. 그저 그분을 믿고 바라보며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나의 의지, 내 열심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하고 평강을 놓친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마치 내가 무언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기때문에 직면하게 된 것이라는 근거없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문제들을 통해 사단이 날리는 '생각'이라는 화살의 공격을 받고, 끊임없이 잠식해 들어가는 생각의 실타래에 묶여 더 복잡한 문제 속으로 들어가 조급함과 불안함으로 발버둥 치게 된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눅 24:36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 20:1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찾으셨을때 평강이 있기를 당부하신 것은 단순히 안부 인사 차원이었을까?

어쩌면 이 질문은 나의 영적 상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금석과 같은 질문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 평강이 있는가? 혹시 나는 세상이 주는 문제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나 혼자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우편에서 나를 도우시려 서 계시는 주님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나에게 평강이 있는가?"

2011년 9월 2일 금요일

리더는 주님께 가장 많이 공급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9월 2일 Heath group prayer meeting에서 sharing 한 내용...

어쩌면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리더가 될 것을 강요받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리더들로부터 새로운 비전을 기대하고, 카리스마를 기대하고, 올바른 선택을 기대하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크리스찬 리더는 어떨까? 구약의 리더들은 메신저들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며 때로는 회개를 요구하고, 때로는 특정한 장소로 이끌어가고, 또 때로는 예배드리는 방법을 제시하는...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가장 많이 공급받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교제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능력으로 구체적인 계획과 해결책과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소위 공급해주어야 하는 현대 시대의 세상적 리더들과는 확실히 구분된 모습이었다.

우리는 크리스찬 리더를 꿈꾸고 있는가? 혹은 리더로서 섬겨야 하는 자리에 있는가?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교제하며 그 분께 무조건적인 공급을 받는 것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이다.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물으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하고 인도해 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누가 리더인가?
구약 시대의 리더는 확실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선택해서 세우셨기 때문에 리더는 너무나도 자명하게 리더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대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원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성소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믿음으로 부르짖고, 구하면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우리는 더이상 우리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이기에, 우리는 모두 리더가 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직책을 가짐으로써 세워지는 리더가 아니라 이 세상의 참된 리더인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도록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가장 많이 공급받는 자가 되어야 하며 늘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날마다 우리의 육적인 것을 죽이며,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능력으로 이끌어 갈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집중하고 순종하며 예수님께서 리더로 세워 쓰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늘 우리에게 물어야 한다.
자신이 이 땅에서 리더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인지하고 있는가? 그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과 또한 인도해가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믿으며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주님께서 간섭하심을 기대하고, 믿으며 날마다 새롭게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삶에서 지치지 않도록 늘 주님께 공급받아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9/2/2011
Young Shik: Leader is the one who should be provided the most

Leaders in non-christian world are accepted as ones who provide insights to the future, resources to solve problems, connections for the integrity of the group etc.
But christian leaders should be ones to get provided the most from God.

Christian leaders before Christ were messengers (Abraham, Moses, and Samuel etc.). They carried over God’s thought and plan to the rest of the people. Thus, they were the ones who interacted with God the most, got provided from God the most.

Then Moses summoned Joshua and said to him in the presence of all Israel, “Be strong and courageous, for you must go with this people into the land that the LORD swore to their forefathers to give them, and you must divide it among them as their inheritance.
The LORD himself goes before you and will be with you; he will never leave you nor forsake you. Do not be afraid; do not be discouraged.”
Deuteromony 31:7-8
How about the era of the New Testament?
Christian leaders are still messengers. However they are more than just messengers. Because it is Jesus, who is inside those leaders, that commands, shows the way to go, and enlightens people.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 2:20
The true leader in this world is Jesus. And thus, if we are christians, we are all supposed to be leaders not because of our ability, knowledge, and experience but because of His presence in us. We all should ask Jesus provide us more, shine light on the path that we should follow. We should check ourselves if we are not blocking His providing and guidance and should let him be the LORD of our life.

Do you think you are currently a leader or a potential leader?
Are you focusing on being filled with the love of Jesus, his wisdom, his passion, and his humbleness or are you focusing on building a concrete plan, finding solutions, and reading the current trends?
Are you conscious of the fact that you are the leader through Jesus and the responsibility as a leader?
Are you seeking His guidance all the time?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tell you great and unsearchable things you do not know.
Jeremiah 33:3

2011년 8월 29일 월요일

은혜받을 준비, 축복받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요즈음 모든 것의 주권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바로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주님뿐임을 차근차근 깨달아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생각나는 것이 과연 과거의 나는 어떠했는가 하는 사실...

지지난 주일 (8/21/2011) 승혁이가 세례를 받았다.
내가 직접 세례를 받을때보다 더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었던 것은 과연 나의 아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 3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조금은 내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음으로 인한 것일까?
아마도 둘 다이지 않을까 싶다. 할렐루야!

내가 세례를 받을때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세례식 후 축하를 받을때 함께 불러주셨던 노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너무나도 흔하게 불리우는 노래이기에 그게 뭐 특별한 것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노래가 특별한 것은 또다시 3년 정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의 경험과 오버랩되어 설명된다.

2004년 박사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나오고 정신없이 수업을 듣고 있을 당시 Caltech에는 매주 진행되는 bible study가 있었다. 밥먹을 시간도 부족해서 책을 보며 밥 한끼를 후다닥 해결해야 했던 시절이기에, 더구나 그 당시의 나에게는 하나님이나 기독교는 전혀 상관없는 토픽이었고 오히려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던 시절이기에 나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모임이었다. 하지만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그 모임에서 밥만 먹고 가도 된다고, 그냥 와서 밥만 먹고 가라는 말은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고, 급기야 금요일 저녁을 해결하고자 하는 속셈으로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바로 그 첫 모임에서 나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상당히 낯뜨겁게 만나게 된다. 저녁을 먹고, 소위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빨리 가서 숙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떠나려는 나를 불러세워놓고 bible study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양팔을 내게 뻗고 그 노래를 내게 불러 주었던 것. 지금 생각하면 축복이자 은혜이겠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시간이었다. 모두들 앉아있는 상황에서 나만 홀로 문 앞에 우뚝 서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두 팔을 내 뻗고 불러주는 그 노래가 끝나기까지의 시간이 나에게는 얼마나 길게 느껴졌었는지...그 사건(?) 이후 bible study 모임은 더이상 내가 갈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결혼하고 교회를 본격적으로 나가기까지 내 머릿속에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바로 그 노래를 내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크리스찬으로서 살기로 공언하는 자리인 세례식에서 다시 듣게 되는 것. 하지만 그 때의 그 노래는 더이상 나를 뻘쭘하게 하는 노래가 아닌, 축복의 노래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어찌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이 개인적인 사건이 은혜를 받는 것, 축복을 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일까?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내가 처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러주었을 때의 나의 삶은 온전히 내가 주인인 삶이었다. 문제들이 있으면 내가 노력해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고, 내 인생의 계획을 세울때에도 온전히 내가 가진 능력과 내가 가진 리소스들을 기반으로 세우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딱히 생각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누군가에게 축복을 받고,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부자연 스러웠던 것. 하지만 이것을 조금더 깊이 들여다보면 바로 나 자신의 교만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던 것이 보인다. "저 사람들이 대체 뭐길래 나에게 은혜를 베풀고 축복을 해준단 말인가?!!" 직접 내뱉진 않았지만, 아니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분명 내 잠재의식 속에는 이런 생각이 열심히 반응하고 있었을 것이다. 죄인으로 이땅에 태어나 그나마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와 은사로 큰 문제 없이 공부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걸 모르고 단지 내가 열심히 했기에 당연히 내가 얻은 상황이라는 생각, 혹시 무엇이라도 계획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운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생각으로 내 삶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요즈음은 이런 교만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고 누리는데 치명적인 장애가 되고 있음을 느낀다. 나의 인생의 주권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일진데 아직도 내가 열심히 해서 무언가 이루려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보게 된다. 내가 내 인생의 앞에 서있는 이상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어떤 은혜도, 축복도 진실되게 누릴수 없음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도 문득 문득 나의 내면에 교만이라는 영적인 담이 높아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주여 기름부어 주시옵소서! 아버지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늘 구한다. 하지만 구함과 동시에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두 팔을 뻗고 축복의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들 앞에서 어색함과 당혹스러움으로 서 있었던 나의 모습처럼, 우리도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서있는 것은 아닌지.
축복과 은혜를 구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경험과, 이성과, 생각으로 무장한 채 우리 안의 교만의 담을 낮추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주님앞에 나아가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이다.
"은혜받을 준비, 축복받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나 자신의 자아를 버리고 온전히 주님께 맡길 준비가 되어있는가?"

2011년 3월 17일 목요일

Diagnostics for All

http://www.dfa.org/index.html

Defense를 끝내고 industry job을 알아보면서 알게된 기업.
non-profit enterprise로서 내가 속한 lab-on-a-chip field의 기술을 이용하면서 제3세계의 의료사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사실이 참 마음에 든다.
내가 개인적으로 처음 이 기술을 접한 것이 1년 전쯤 이었던가?
처음 봤을때는 저런걸 뭐에 쓰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어쩌면 간단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귀한 기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카데미아에 있을지 아니면 인더스트리로 갈 지 아직 정확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내 인생의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일을 위해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2011년 3월 9일 수요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우리의 느낌을 바꾼다

2010년 새해가 막 지난 무렵 런던 서부의 한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29살의 남성이 층계참에서 떨어져 6인치 못 위로 떨어졌다. 못은 그의 부츠를 뚫고 거의 발등까지 파고들었다. 상상도 못할 고통에 신음하는 그를 동료들은 즉각 구급차에 태웠고, 구급차는 서둘러 그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못이 조금만 움직여도 그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응급실 의사들은 재빨리 수술 전에 졸음이나 의식을 잃게 만드는 데 사용하는 미다졸람으로 그를 진정시켰다. 곧이어 의사들이 모르핀보다 100배는 더 강력한 진통제로 주로 말기 암 환자에게 처방하는 펜타닐을 추가 투여한 것을 보면 그 청년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환자를 진정시키고 통증을 제어하며 의사들은 그의 부츠를 조심스럽게 벗겨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작업 부츠를 다 벗겨냈을 때 그들은 놀라운 일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의 발가락 사이로 못이 깔끔하게 지나갔던 것이다. 상처라곤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299p)

해리 벡위드 지음, 이민주 옮김 '언씽킹 Unthinking - 행동심리학이 파헤친 인간 내면에 관한 매혹적 통찰' 중에서 (토네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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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우리의 느낌을 바꾼다."

우리가 느끼고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는 않습니다.

공사장에서 6인치 못 위로 떨어진 한 영국 청년.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발에 못이 찔렸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모르핀보다 100배나 강력한 약물까지 필요했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의 느낌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못은 발가락 사이로 아무 상처도 남기지 않고 지나갔지요.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의 몸이 종종 우리의 뇌를 속이는 것처럼 우리의 뇌도 우리의 몸을 속인다는 것이지요.

못에 찔린줄 알았던 한 영국인 청년의 흥미로운 사례를 보며 우리가 최선이라고 믿고 내렸던 선택이나 결정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3/8/2011 예병일의 경제노트에서

2011년 1월 21일 금요일

졸업

드디어 졸업을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
일단 Jim은 3월 첫째, 둘째 금요일이 좋다고 했으니 다른 교수님들이 된다고 하면 그 시간이 될터인데 아직 졸업 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지 대책이 없는게 불안하네.
그러게 좀 부지런히 일찍일찍 알아 볼 것을...쩝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으로 여기저기 찔러봐야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고 싶어하는 것들과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했을 때 할 수 있는 것들의 갈등은 계속 되고 있다. 끊고, 내려놓는 것, 미련을 버리는 것에 참 약한 나의 모습...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씀을 계속 받고 있는데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듯 하다.

당분간은 바빠질듯...

2011년 1월 5일 수요일

Gift

새해를 시작하면서 정말 큰 선물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2011년 1월 4일 화요일

2011 !!!

2011년에 접어든지 벌써 4일째다.
아직은 날짜 뒤에 11 보다는 10이라는 숫자를 덧붙이는 것이 익숙한 시간.

2011년은 나와 우리 가정의 삶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기에 그만큼 더 기대가 된다.
정말 오랜기간 힘들게 했던 논문을 막 submit한 터라 약간은 소강 상태이지만 졸업하기 전에 마무리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에 조금씩 정리를 해보려고 하고 있다. 어차피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어떤 일에 집중을 하고 끝내려 할 지를 결정해야 겠지만 아직은 뚜렷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일들을 벌려 놓았다가 결국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나가야 하는 느낌이어서 조금은 찝찝한 것도 사실인데 기도하는 가운데 좋은 선택을 해서 간단하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보려 한다.

연말을 빈둥거리면서 보냈더니만 새로 일을 시작하는게 쉽지 않다.
어서 무기력에서 벗어나서 열심을 내 보아야지.

Happy New Year~!!